[문화칼럼]강우방/票에 밀린 古都보존

  • 입력 2000년 5월 10일 19시 15분


신라의 경덕왕은 ‘나라가 비록 위태하더라도 아들을 얻겠다’고 상제(上帝)에게 청했다. 그 아들이 바로 8세 때 즉위한 혜공왕이다. 권력의 세습은 달성됐으나 상제의 예언대로 도적이 벌떼처럼 일어나고 귀족들 사이에 권력투쟁이 벌어져 혜공왕은 살해되고 결국 이때부터 나라가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설화는 때때로 사실보다 웅변적이다. 이처럼 한 몸을 이루는 정권과 금권에 대한 탐닉은 동서고금에 변함이 없다. 세계는 늘 변한다는 제행무상(諸行無常)이 바로 진리라고 하지만 내게는 실제로 변한 것이란 하나도 없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예술작품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민족혼이 응집된 것이기에 정치와 종교의 문제를 초월해 인류가 한마음으로 보존하려고 최대의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 모든 것이 변한다고 해도 변해서는 안될 것, 인위적으로 변질시켜서는 안될 것, 생명보다 더 귀중한 것이 예술작품이고, 예술작품이 밀집돼 있는 고도(古都)다. 그래서 유네스코는 세계문화유산이란 것을 지정해 보호하고 있지 않은가.

지금 우리에겐 공주 부여 경주 서울 등 네 곳의 주요 고도가 있다. 서울은 이미 고도의 면모를 상실했지만 나머지 셋은 그런대로 고도의 풍취를 지녀 왔다.

금강을 등지고 자리잡은 공주는 비록 협소하지만 금강의 남다른 정취가 있다. 공주를 수호했던 공산성(公山城) 동문 바로 가까이에 아파트가 건립되고 있다고 한다. 아무도 감히 생각지도 못했던 공산성이란 성역이 깨지기 시작했다. 사적(史蹟)지구에서 100m 내에는 건축이 불가하다는 통념이 최근 문화재보호법의 완화로 깨져버렸기 때문이다. 광복 후 최대의 발견이라 할 수 있는, 백제문화의 모든 진수를 보여준 공주 무령왕릉의 건축 내부와 주변환경조차 지키지 못하고 있다.

백마강 굽이굽이 감도는, 우리나라에서 풍광이 가장 아름다운 곳 가운데 하나인 부여는 더 심각해지고 있다. 백마강 서쪽 건너편엔 이미 고층아파트가 들어섰고 시내 쪽에도 15층 아파트 건립허가가 이미 나 있다는 소식이다. 경주의 안압지에 해당하는 백제의 궁남지 바로 옆 옛 이궁(離宮)터가 있는 화지산을 일부 깎아내어서까지 터를 닦고, 계백장군 5000결사대 충혼탑을 건립 중이라 한다. 또 백마강 건너 부산(浮山) 암반에는 계백장군 신사임당 세종대왕 등 5명의 초대형 초상조각을 계획하고 있다고 한다.

경주는 더더욱 심각하다. 얼마 전 유네스코 조사단이 다녀간 이후 국제사회에서 문화유산 보존에 실패한 대표적 예로 경주가 손꼽히고 있다는 서글프고 부끄러운 소식이 들려온다. 남산 계곡을 깊이 파고들며 들어서는 집들, 절대농지가 선거 때마다 조금씩 풀려 주택지가 조성되고 있다. 왜 사적지구마저 급속히 잠식당하고 있는가.

정부는 그린벨트 절대농지 등에 대한 규제를 매년 완화하고 있다. 그 규제완화로 인해 더욱 규제를 강화해야 할 고도들이 휩쓸려 버린 것이다. 지금이라도 이 세 고도만을 지키기 위해 정부가 고도보존법을 추진해도 늦은 감이 있는데 오히려 역행하고 있는 셈이다. 이러한 현상은 지방자치단체장들이 선거로 뽑히면서부터 더 심해지고 있다. 오직 한 표를 위해, 오직 몇몇 개인의 허망한 명리를 위해 민족혼이 응결된 예술작품의 흔적을 훼손하고 그걸 둘러싼 풍치를 파괴하고 있는 것이다. 단 몇 년의 권력과 금권을 위해 천년의 고귀한 예술의 생명을 질식시키고 있다. 정부는 속수무책이어서 문화정책이랄 게 없고 그 자문기관이자 의결기관인 문화재위원회조차 아무런 대책을 강구하고 있지 못하다. 그 관련 학자들은 침묵을 지킬 뿐만 아니라 오히려 합법적으로 그 훼손의 길을 틔워 주고 있다. 이런 추세라면 2, 3년 후면 이 땅에 고도의 유현(幽玄)한 분위기는 아예 없어질 것이 자명하다.

나는 때때로 우리 조상이 남겨준 고귀한 민족영혼의 결정체가 학자 관리 언론인 정치가 그리고 일반 주민에 의해 능욕당하고 있다는 생각을 금할 수 없다. 우리가 예술품(유적 유물)말고 무엇을 세계에 내세울 수 있는지 엄숙히 스스로 물어야 한다. 내가 침묵하지 못하는 것은 수천 년 동안 아름답게 자라온 예술품을 내 생명만큼이나 사랑하기 때문이다. 누구를 위하여 태양은 매일 떠오르고 있는가.

<강우방 국립경주박물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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