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 존]아카데미는 변하고 있는가?

  • 입력 2000년 3월 31일 11시 56분


"아카데미 후보작 명단이 발표될 때마다 아카데미 위원회가 보수적이라는 기사를 읽는 것도 이제는 지겹다."

94년 <포레스트 검프>로 아카데미 작품상을 수상한 제작자 스티브 티쉬의 불평이다. 하지만 그는 올해 아카데미가 달라졌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힐러리 스왱크가 여우주연상을 수상했고 <아메리칸 뷰티>는 5개 부문의 트로피를 가져갔다. 앞으로는 아카데미를 보수적이라고 평가할 수 없을 것이다."

그의 말처럼 미국 언론은 '아카데미가 금기를 깨뜨렸다'고 한 목소리를 내고 있다. '아카데미 위원들이 논쟁적인 작품에 투표하기 시작했다'는 보도도 나오고 있다. 실제로 2000년 아카데미가 의외의 작품들을 선택했다는 것을 부정하는 사람은 많지 않은 것 같다.

그것은 아카데미가 터부시 해오던 소재를 적극적으로 끌어 안은 것에서 확인된다. <소년은 울지 않는다>에서 남장 소녀 브랜든 티나를 연기한 힐러리 스왱크가 여우주연상을 거머쥔 것은 단적인 사례다. 5천6백 명의 위원 가운데 대다수가 중산층 백인 남성인 아카데미 위원회는 동성애자와 유색인종을 은근히 차별해 왔기 때문이다.

'엔터테인먼트 위클리'가 "브랜든 티나는 사기꾼이었다"는 한 여성 위원의 말을 인용하면서 "상을 받을 때가 된" <아메리칸 뷰티>의 아네트 베닝에게 여우주연상이 돌아갈 것이라고 점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인터넷 영화 잡지 '미스터 쇼비즈' 역시 스왱크가 여우주연상을 받아야 하겠지만 "할리우드에서는 모든 일이 그렇게 돌아가기 마련"이라며 베닝이 수상자가 될 것이라고 예측했다.

<아메리칸 뷰티>가 작품상, 감독상 등 주요 5개 부문을 휩쓴 것도 금기의 파괴로 평가받고 있다. 동성애, 미성년자와 중년 가장의 섹스, 붕괴된 가정이란 소재를 다룬 이 영화는 가족의 평화와 개인의 존엄성을 중심 가치로 삼아온 아카데미의 전통과는 많이 어긋나는 것이 사실이다. 동성애자, 양성애자, 남장여인, 수녀의 임신 등 파격적인 이야기를 그린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스페인 영화 <내 어머니의 모든 것>이 외국어영화상을 수상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아카데미는 진정으로 변한 것일까? 한편에선 그렇지 않다는 반론이 제기되고 있다. <아메리칸 뷰티>의 승리는 스티븐 스필버그가 대표로 있는 이 영화의 제작사 '드림 웍스'가 펼친 막강한 로비의 결과일 뿐이며 영화의 결말도 현실을 인정하는 보수적인 색채를 띠고 있다는 것이다. 심지어 나이 차이가 많은 여자와 불륜을 저지르고도 건재한 클린턴, 그의 파트너였던 앨 고어의 민주당과 이 작품의 색깔을 연관시키며 집권당에 대한 암묵적인 지지를 보내는 게 아니냐는 시각까지도 없지 않은 형편이다.

그뿐 아니다. 미국의 자부심인 사법제도가 거짓일 수 있다고 고발한 <허리케인 커터>의 댄즐 워싱턴이 고배를 들어야 했고 정치 경제 언론이 야합해서 생긴 담배회사의 사기극을 폭로한 <인사이더>가 푸대접을 받은 사실을 감안한다면 아카데미의 보수성은 여전히 살아있다는 것이다.

새로운 세기의 첫 해에 아카데미가 예년에 비해 다양성을 포용한 것은 분명하지만 변화의 깃발을 치켜 세웠다고 단언하는 것은 성급한 일이 아닐까.

김태수 (FILM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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