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노 타워]권순활/빈대 잡고 초가삼간 태울수야…

  • 입력 2000년 3월 30일 19시 45분


현대그룹 ‘왕자의 난’ 이후 재계는 잔뜩 긴장해 있다. 한국 재벌의 고질적 폐해인 총수일가 지배체제에 대한 비판적 여론이 들끓고 있기 때문이다. 정부도 재벌 지배구조의 근본적 개혁에 본격적으로 나섰다.

현대가 경영자협의회와 구조조정본부 해체 등의 방침을 정한 것도 더 이상 버틸 수 없다는 위기의식의 발로일 것이다. 다른 그룹도 현대에 원망의 눈초리를 보내면서도 어떤 식으로든 대응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으로 몰리고 있다.

평소 재벌문제에 별 관심이 없던 일반국민의 분노도 심상찮다. ‘왕자의 난’이 절정에 달했을 때 기자는 한 40대 남자의 전화를 받았다. 그는 신문 1면에 실린 현대 정몽구 정몽헌회장 형제의 싸움을 보고 분통이 터져 전화를 했다며 “이런 X들을 신문에서 왜 그냥 두느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같은 날 신문 다른 면에 현대사태를 비판적으로 접근한 해설기사가 실렸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고 나서야 화를 풀었다.

재벌그룹에 쏟아지는 분노와 질타는 대기업이 스스로 초래한 자업자득의 성격이 짙다. 한 대기업 관계자는 “나도 회사봉급을 받고 있지만 경영투명성이 어느 때보다 요구되는 시대에 전근대적 지배구조를 고집한데서 생겨난 필연적 결과”라고 한숨을 쉬었다.

다만 재벌이 아무리 밉더라도 사회 분위기가 지나치게 반기업적으로 흐르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는 데는 정부도 동의한다. 여러 가지 문제에도 불구하고 현실적으로 한국경제를 이끌어가고 고용을 책임진 주축은 대기업이기 때문이다. 경제에서 국경의 의미가 희미해진 지금 외국자본과 어깨를 겨루고 경쟁해야 하는 주체도 이들이다. 재벌의 잘못된 행태는 바로잡아야 하지만 뿔을 바로잡으려다 소를 죽이는 ‘교각살우(矯角殺牛)’만은 피해야 하지 않을까.

권순활<경제부기자> shkw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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