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타임스/되돌아 본 뉴욕100년]1970년대

  • 입력 2000년 3월 19일 20시 08분


1970년대에 뉴욕은 바닥으로 추락했다. 뉴욕을 내동댕이친 사건 중에서도 가장 충격적이었던 것은 1974년 도시가 완전히 빈털터리가 되었음을 발견한 것이었다. 수십년 동안 주요 세원이 되어줄 중산층들이 도시를 빠져나가는데도 그냥 손을 놓고 바라보고만 있었던 것, 사회복지 자금을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나게 지출한 것, 시 정부가 빚을 지지 않으려고 의심스러운 재정적 수단들을 남발한 것 등이 마침내 한꺼번에 터져 나온 것이다.

파산의 위험을 앞에 둔 뉴욕은 자존심을 버리고 연방정부에 도움을 요청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제럴드 포드 대통령은 뉴욕시의 요청을 거절해버렸다. 물론 백악관은 나중에 연방정부의 대출을 보장해줌으로써 뉴욕시가 우선 다급한 불을 끌 수 있도록 해주었지만, 맨 처음 도움 요청을 거절당했던 굴욕감은 그대로 남았다.

도시 설립 80년째에 접어든 뉴욕은 도저히 손을 쓸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 있었다. 뉴욕의 범죄율이나 실업률이 70년대보다 높았던 적은 있었지만 뉴욕 시민들이 자신들의 도시에 대해 70년대만큼 부끄러워했던 적은 없었다. 70년대에 뉴욕에서는 뉴욕시 경찰국의 조직적인 부정부패가 만천하에 드러나고 미치광이 살인마 ‘샘의 아들’이 날뛰었다. 테러리스트들은 맨해튼과 라구아르디아공항에서 폭발사고를 일으켰고 브롱크스에서는 연속적인 화재가 발생했으며 1977년의 정전사고 때에는 도시 전체에서 약탈과 폭력이 자행되었다.

뉴욕 시민들은 이미 오래 전부터 자신들이 사랑하는 도시가 걷잡을 수 없이 추락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범죄율이 치솟고 거의 2주마다 한번씩 시 공무원들의 파업이 일어났다. 쓰레기 수거를 담당하는 직원들도, 시립병원의 의사들도 파업을 벌였다. 1971년 1월에는 심지어 경찰마저 파업을 벌이는 전대미문의 사건이 일어났다. 다행히도 경찰의 파업기간에는 날씨가 아주 추웠다. 도둑들도 집안에 박혀 있을 수밖에 없었다. 사실 경찰이 파업을 벌이는 동안 범죄 발생건수는 오히려 줄어들었다.

뉴욕은 마치 모든 것을 포기해버린 것처럼 보였다. 많은 뉴욕 시민들은 비지스의 노래 가사처럼 그저 ‘살아남는 것’만을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브로드웨이도 이러한 추세를 받아들여 저녁 공연 시간을 7시30분으로 1시간 앞당겼다. 밤의 범죄자들이 타임스퀘어를 채우기 전에 관광객들과 교외에서 온 관객들이 안전하게 도시를 빠져나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뉴욕은 다시 일어섰다. 뮤지컬 ‘코러스 라인’이 브로드웨이에 활기를 불어넣었고, 오랫동안 잠잠하던 야구팀 양키스도 커다란 포효와 함께 돌아왔다. 뉴욕은 심지어 자신들의 도움 요청을 거절했던 워싱턴에 복수를 하는데도 성공했다. 1976년에 뉴욕의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전당대회를 열었던 민주당이 대통령 선거에서 포드 대통령을 누르고 승리를 거뒀던 것이다.

(http://www.nytimes.com/specials/nyc100/nyc100-8-haberman.html)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