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오래된 정원(334)

  • 입력 2000년 1월 26일 19시 08분


송영태와 나는 구월 초에 베를린을 떠났습니다. 여행사에서 지정해준 날짜에 모스크바에 도착해야 되었어요. 우리는 여행 정보에 따라 여러 가지 준비를 했구요. 글세 시베리아에서는 팔월 말이면 벌써 두 달 동안의 짧은 여름이 끝나 첫눈이 온대요. 컵 라면도 좀 사두었어요. 베를리너 스트라세의 종점에서 공항으로 가는 리무진 버스를 탔어요. 쇠네펠트 공항은 예전 동독의 국제공항이었는데 주로 동구나 소련 그리고 아시아권 사회주의 나라들로 가는 항공 노선이 출발하고 있었어요. 물론 북한으로 가는 비행기도 있지요.

아에로플로트 편으로 모스크바의 세레메티예보 공항에 내리니 궂은 비가 내리고 있었습니다. 공항 안은 휑하니 넓은데 여행 시즌이 막 끝나서인지 승객은 적었고 썰렁했어요. 다시 리무진을 타고 붉은 광장과 모스크바 강변에 접해있는 러시아 호텔에 갔는데 날이 일찍 어두워졌어요. 빗속에 가로등이 부옇게 켜지기 시작했지요.

그날 비 오는 밤 거리로 나가서 돌아다니다가 저녁을 먹고는 밤 늦게까지 카페에 앉아서 맥주를 마셨지요. 붉은 초를 두 개나 구리 촛대에 꽂아서 식탁에 놓아 두었는데 그 덕분에 영태가 제법 취한 걸 눈치채지 못했어요. 그도 그랬지만 나는 출발할 때부터 별로 말이 없었던 것 같아요. 사실은 가로막힌 곳이 없는 대륙을 주욱 달려보자던 오랜 소망 때문에 앞 뒤 물어보지 않고 이 여행에 따라나섰던 셈이예요. 생각했던대로 스산하거나 무섭지는 않았지만 현대식 호텔마저 음울해 보였죠. 벌건 녹물이 나오는 수도꼭지와 골목에서 비틀거리는 주정뱅이들이며 딱딱하고 거만한 표정의 공항 관리들 그리고 살찌고 무뚝뚝한 아줌마 봉사원들이 마치 거대한 낡은 관청에 들어온 듯한 느낌을 주었어요. 상점의 진열대에 물건이 별로 보이지 않는다거나 곳곳마다 심지어는 하찮은 물건을 파는 작은 가게 앞에도 긴 줄을 이룬 입을 꾹 다문 사람들의 무표정한 얼굴은 그래도 이해할만 했어요. 이들은 여행자를 위해서 살지 않는 여기 토박이들일테니까 우리 보다는 덜 불편하겠지요. 그들은 자신의 작은 아파트로 틀어박히면 그만이지요. 송영태는 조금 떨리는 손으로 맥주를 따라 마시면서 입을 떼었어요.

정말 한심해. 세계의 육분의 일이라는 땅 덩어리를 가진 나라가 이렇게 엉성하다니. 이건 무너지는 담벼락 같은 거야. 오랫동안 수리도 않고 버려둔 낡은 콩크리트 건물의 모퉁이가 부실부실 떨어져 내리구 있어. 사람을 이렇듯 아무렇게나 관리하다니.

송 형 말은 건물 쪽이야, 사람을 얘기하는 거야?

모든 틀거리는 사람이 만들었으니까 결국은 사람이 문제지.

나는 그냥 시시둥한 느낌으로 말했어요.

꿈 속의 여인을 그리다가 뒤늦게 속옷을 본 거야.

어디 뭐 그런 데가 없을까? 바위 틈으로 들어가면 뭔가 딴 세상이 있는…무슨 경전에 나오듯이 세월도 역사도 의무나 권리도 정해져 있지 않은 그런 곳이.

〈글:황석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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