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영웅 세기말 감회]'박치기왕' 김일翁

  • 입력 1999년 12월 13일 19시 56분


“이제 남은 타이틀은 ‘생로병사(生老病死)’의 순리뿐이에요. 그나마 이렇게 경기장에 나다니면 조금 더 젊어진 기분이 들어요.”

검버섯과 주름살로 뒤덮인 얼굴…. 사각의 링에서 제왕으로 군림했던 ‘박치기 왕’ 김일. 세월의 흐름속에 이제 그도 71세의 노인이 됐다.

4일 광주 구동실내체육관. 후계자 이왕표의 세계헤비급 프로레슬링대회출전을 격려하기 위해 노구를 이끌고 서울에서 내려온 김씨를 만났다.

“지방에 오면 기분이 좋아요. 추억도 더듬을 수 있고….”

하얀 넥타이에 금테 안경…. 차가운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허리를 곧추세우고 앉아있는 그의 모습은 그때 그시절 화려한 영광의 주인공임을 알게 한다.

94년 1월13일. 그는 휠체어에 몸을 의지한 채 귀국했다. 왼쪽발의 피가 안통하는 혈전성정맥염과 무리한 박치기로 인한 목뼈 변형. 고통의 나날을 보내던 그에게 스승 역도산밑에서 함께 레슬링을 배웠던 안토니오 이노키(전 일본참의원)가 도움을 자청, 일본에 건너간지 6개월만이었다. 그러나 이노키는 김씨를 초청한 직후 정치 경제적으로 파산, 종적을 감췄고 김씨는 후쿠오카의 서민병원으로 옮겨져 힘겨운 투병 생활을 해야 했다. 이 사실이 국내 언론을 통해 알려지자 서울 노원 을지병원 박준영 이사장이 김씨의 치료를 책임지겠다고 나서 고국땅을 다시 밟게 됐던 것.

“아직 하루 세번 꼬박 꼬박 약을 먹어야 하지만 병세는 많이 호전됐어요. 당뇨가 새로 발견된 것이 좀 걱정스럽지만….”

김씨는 이제 후배들에게 의지해 10여m 정도 걸어다닐 수 있다. 장시간의 자동차 여행도 힘들지만 견딜만한 수준. 때문에 연 10회 가량 후계자 이왕표를 쫓아 각지를 다닌다.

“평소는 병원에만 있어요. 아침 5시쯤 일어나 뉴스보고 신문보고. 가끔 가족이나 후배가 찾아오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데요.”

그는 걸어온 길에 결코 후회한 적이 없다고 말했다. “어느 시대든 그 시대만의 꿈이 있어요. 저는 가난하고 힘들었던 60,70년대 어린이에게 꿈과 희망을 줬다고 자부해요. 밥값은 하고 산 셈이죠.”

“프로레슬링은 쇼가 아니냐”는 질문에 뭉그러진 귀를 내보인다. “역도산 선생이 위에서 깔아뭉갤때마다 호흡을 할 수 없어 살려고 옆 얼굴을 링에 시비다 귀가 이 모양이 됐어요. 저에게는 훈장이죠. 쇼라면 이렇게는 안됐을 겁니다.”

내년 1월22일 서울에서 공식 은퇴식을 갖기로 한 ‘박치기 왕’. 그는 옛날 이야기를 풀어나가다 급속히 추락한 한국 프로레슬링이 안타까운 듯 긴 한숨을 내쉬었다.

▼하고픈 이야기▼

우리는 과거를 너무 빨리 잊는 것 같다. 좀 살만해지니까 어려웠던 시절을 잊고 사치와 낭비를 일삼아 최악의 경제난을 맞은 것 아닌가. 일본의 재벌사인 미쓰비시사 회장이 가정부도 안두고 검소하게 생활한다는 말을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 또 요즘 TV를 보면 우리말이 너무 오염되고 있다는 느낌이다. 아름다운 우리말을 왜 그런식으로 취급하는지 이해가 안된다.

조국을 폄훼하려는 건 아니다. 나는 일본에서 수십차례 귀화 유혹을 받고도 끝내 거부하고 한국인으로 남았다. 좋은 것은 지키고 나쁜 것은 버릴 줄 아는 지혜를 가져야 할 것이다.

선수시절 좌우명은 ‘참을 인(忍)’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미덕은 양심에서’로 바뀌었다. 후배 선수들에게도 언제나 ‘사람됨’을 강조하고 있다.

▼처음 밝히는 얘기▼

▽어떻게 ‘박치기 왕’이 됐나〓57년 프로레슬링을 처음 배울 때 역도산 선생이 “조선 사람은 원래 머리가 강하니 박치기를 연마하라”고 주문했다. 당시 일본에는 평양에서 열린 한 축구경기에서 조선인의 헤딩슛 볼이 골대에 맞자 불이 났을 정도로 셌다며 ‘평양 박치기’란 말이 회자되고 있었다. 이후 역도산선생은 골프채나 재떨이 등으로 매일 내 이마를 때리며 단련시키기 시작했다. 늘 머리가 아프고 눈이 뱅뱅 돌아 하루는 보따리를 쌌다. 야반 도주를 하기로 결심한 그날 밤 선생이 눈치를 챘는지 나를 부르더니 “내가 너를 때리지 않으면 너는 성공할 수 없다”며 처음으로 다독였다. 선생의 진심을 이해하고 그 즉시 보따리를 풀었다.

▽박치기 때문에〓70년대 TV가 처음 들어간 후 고향 동네에는 경기가 있을 때면 마릉사람이 모두 응원했다고 한다. 그런데 하루는 내 이마에서 피가 흐르자 한 노인분이 “아이고, 우리 김일이 죽네”라고 고함을 지른 후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지금도 그 분을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진다.

▽왕년엔 많이도 먹었지〓한창때는 체중이 120㎏이 나가 먹기도 많이 먹었다. 최고 기록은 초밥 98개와 맥주 500㏄짜리 64잔. 오후 5시부터 다음날 오전 2시까지 먹어치웠는데 목표로 했던 초밥 100개를 다 채우지 못해 아쉬웠다.

〈광주〓배극인기자〉bae2150@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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