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옴부즈맨칼럼]유재천/사회쟁점 '공론의 장' 마련 미흡

  • 입력 1999년 11월 21일 18시 47분


한국 신문들은 중요한 공공의 관심사를 사회의 의제로 설정하고 ‘공론의 장’을 마련하여 찬반 토론을 거쳐 여론을 형성하는 기능을 수행하는 데 소홀하다. 아무리 주요한 현안이라도 일회성 보도나 논평에 그치고 만다. 예컨대 선거법 개정의 핵심 사안인 선거구 문제만 해도 그렇다. 소선거구제를 유지하느냐 아니면 중선거구제로 바꿀 것인가는 물론 권역별 정당명부식 투표제를 도입할 것인가 아니면 기존의 전국구 방식을 그대로 둘 것인가를 두고 여야 간에 정치협상이 진행중이다.

그러나 언론은 이 문제를 공론에 부치지 않고 있다. 선거구제를 바꾸고 정당명부식 투표제를 도입하는 문제는 의회정치의 판도에 결정적인 변화를 초래할 중대한 관심사가 아닐 수 없다. 따라서 언론은 마땅히 이 문제를 의제로 설정하고 우리 정치의 선진화를 위해 어떤 제도가 최선인지를 논의하는 ‘공론의 장’을 열어 주어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결국 언론은 중대한 국민의 선택을 당리당략과 의원 개개인의 이해득실에 따라 결정하는 것을 방조하는 셈이 되고 만다.

이왕 언론의 ‘공론의 장’구실을 강조하는 이야기가 나온 김에 한가지만 더 제안하고자 한다. 다름 아니라 입법예고된 법안 가운데서 중요한 관심사를 공론에 부쳐달라는 것이다. 우리 언론은 그렇게 하기는커녕 입법예고한 사실조차 보도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예를 들어 등급외 영화상영 전용관 허용을 위한 영화진흥법 개정안만 해도 그렇다. 신문들은 국무회의에서 16일 개정법안이 의결되었다고 보도했다. 물론 이 개정 법안은 법제업무 운영 규정에 따라 입법예고 되었지만 거의 모든 신문들이 그런 사실을 보도하지 않았다.

그 동안 신문들은 영화 ‘거짓말’의 경우에서 보듯이 등급외 판정이 내려질 때마다 표현의 자유를 내세워 현행 등급제에 대해 이의를 제기해 왔다. 따라서 자연히 등급외 영화 전용상영관 허용문제가 논란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찬반 의견이 팽팽하게 대립하는 등급외 영화 전용관을 허용하는 영화진흥법 개정안이 입법예고 되었을 때 그 개정안의 내용을 보도하고 토론의 장을 마련해 여론을 수렴하는 일을 신문은 당연히 해야 옳았을 것이다. 그러나 어느 신문도 그런 구실을 하지 않았다.

입법예고 법안 내용의 보도 여부는 신문이 선택할 사안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자신들이 관심을 표명해 온 사안이 입법예고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보도도 하지 않고 공론에 부치지도 않는 것은 자가당착이라고 아니 할 수 없다.

사족이지만 ‘성인영화 전용관 내년 6월 문 열어’라는 17일자 동아일보 제목은 잘못된 것이다. 국무회의에서 의결된 영화진흥법 개정안은 국회에서 통과되고 대통령이 공포하여야 발효되기 때문이다.

영화 ‘텔 미 썸딩’의 개봉을 하루 앞둔 12일에 동아일보를 비롯한 도하(都下) 대부분의 신문들이 일제히 그 영화를 소개하는 기사를, 그것도 다같이 문화면 머릿기사로 게재한 사실을 어떻게 이해해야 옳을까? 감독의 연출 솜씨, 시나리오, 배우들의 연기, 촬영, 음악 등이 어떠한지에 대한 의견이 없는 영화소개는 독자들의 선택에 도움을 주기는커녕 오도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다시 한번 강조한다.

유재천<한림대교수·언론정보학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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