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경택칼럼]우리는 무엇을 잃고 있나

  • 입력 1999년 10월 22일 19시 15분


박정희(朴正熙)전대통령이 되살아나고 있다. 그의 20주기(10월26일)에 즈음해 여기저기서 추모행사가 잇따른다. 26일 당일의 추도식은 물론이고 어록집출판기념회 사진전시회 연극공연 특집방송 등 다양하다. 25일(오후6시 세종문화회관 세종홀)로 예정된 어록집출판기념회에는 여야 3당 대표를 비롯한 거물급 정치인들이 대거 참여한다는 보도다. 표(票)가 될 만한 곳이라면 어디라도 가리지 않고 벌떼처럼 몰려드는 것이 정치하는 사람들이니까 여러가지를 계산한 정치인들이 이런 모임에 구름처럼 몰려드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이미 3억원 지급▼

하기야 이미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이 지난 여름 발족한 박정희대통령기념사업회 명예회장으로 추대돼 있는 마당이니 옛 공화당정권 시절의 사람은 물론 현정권의 사람들도, 정치철학이 박대통령과 같건 다르건 상관없이 몰려들 것이다. 정부가 박정희기념관건립(100억원)과 기념사업회 운영비(5억원)로 내년 예산에 105억원을 책정, 국회심의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은 다 드러난 얘기다. 문제는 9월에 이미 금년도 예비비에서 3억원을 기념사업회경상경비로 지급했다는 사실이다. 그러니 박정희기념사업은 그것을 반대하는 사람이 많건 적건 상관없이 국민의 혈세를 지원받는 국가적 사업이 돼버렸다.

‘박정희 비판’의 소리도 만만찮다. 대표적인 것이 박정희기념관건립 및 국고지원을 반대하는 전국역사학자모임(실무위원장 주진오상명대교수)이다. 조동걸 강만길 이만열씨 등 저명한 교수와 역사를 가르치는 중고교 교사 등 17명이 공동대표다. 이들은 전국의 역사학자 및 교사들을 상대로 서명을 받고 있다. 25일 서명자 명단을 공개하고 대토론회(낮1시 연세대동문회관)도 갖는다. 국회예결위에서 박정희기념관건립비 지원예산의 타당성을 따지는 공청회도 열도록 하겠다고 벼른다.

김대통령과 함께 민주화운동을 한 사람들은 묻는다. 도대체 당신의 정체성(正體性)은 무엇입니까. 화해와 화합이란 미명 아래 박정희도 전두환도 그리고 김현철도 다 용서하고 손잡고 포용한다는 말입니까. 그러나 원칙 없는 화해나 화합은 야합에 불과하지 않습니까. 문민정부시절 역사바로세우기작업의 하나로 전두환 노태우전대통령을 처벌하기 위한 특별법을 제정할 때도 이를 반대하는 측의 논리는 항상 화해와 화합이었다.

박대통령 집권시절, 우리 경제는 크게 성장했다. 그러나 그 성장에는 ‘인간’이 없었다. ‘사람답게’가 없었다. 인권도 정의도 개발독재의 성장제일주의에 짓눌려야 했다. 그러는 사이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 ‘가치’들을 너무 많이 잃었다. 20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얼마나 달라졌나. 50년 만에 진정한 정권교체가 이뤄졌고 민주화도 진척됐다.

▼돈되는 것, 표되는 것▼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우리는 아직도 개발독재시대의 그림자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 시절 공포정치의 중심이었던 중앙정보부의 후신인 국가정보원이 아직도 도청을 하느냐 안하느냐를 놓고 여야가 싸움을 계속하고 있고 시민들의 도청 불안감은 가실줄 모른다. 언론탄압을 했느니 안했느니 하는 시비도 계속되고 있다. IMF위기에서도 부자들은 더 부자가 되고 노동자 샐러리맨들은 무한경쟁에 내몰린 채 짓눌리고 쫓겨나고 스트레스에 잠 못이루기 일쑤다. 얼마전 과로와 스트레스에 지친 나머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어느 은행지점장의 유서는 시대와 세상을 향한 통곡이다. “나는 은행을 위해서 일한 결과로 너무 많은 것을 잃었습니다.” 36세의 가장이 강물에 몸을 던지면서 절규한 ‘많은 것을 잃었다’의 많은 것은 무엇일까. 돈? 명예? 권력? 아닐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도 모든게 돈이요, 표요, 권력이다. 문화도 돈되는 것, 대학도 학문도 돈되는 것, 신지식인도 돈되는 것이 최고다. 또 표를 모으기 위해서는 조세정의도 원칙도 약속도 소용없다. 서민층 중산층을 위한 정책이라고 자랑했던 고급주택 중과세 방침을 하루 아침에 백지화하고 투신사정리 의보통합도 미뤄놓기만 한다.

돈되는 것, 표되는 것만 따라다니다 보면 우리가 정작 지켜야하고 찾아야 할 ‘보다 귀중한 것’은 잃어만 가는 게 아닐까.

어경택〈논설실장〉euhk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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