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밀레니엄/미디어정치 개막]60년 첫 TV토론

  • 입력 1999년 10월 6일 19시 47분


딩숲과 호수가 조화를 이룬 미국 시카고시. 노스매클럭코트 630번지에 자리잡은 CBS의 계열사 WBBM 방송국은 여느 방송국들과 별 다름이 없어 보였다. ‘데이비드 레터맨쇼’등 CBS의 인기프로들은 대부분 뉴욕에서 제작되기 때문에 시카고 CBS에서는 주로 지역 뉴스를 제작하고 있었다. 분주히 움직이는 스태프 중에서 39년전의 일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1960년 9월 26일. 시카고 CBS에서는 선거문화를 혁명적으로 변화시킨 하나의 ‘사건’이 있었다. 역사상 최초로 열린 대통령 후보들의 TV토론회였다. 케네디와 닉슨 두 후보의 명암을 가른 이 토론회는 TV의 막강한 힘을 여지없이 과시하며 텔레크라시(미디어정치)시대를 활짝 열었다.

당시 토론회 패널 중 유일한 생존자인 샌디 오커 전 NBC기자는 전화인터뷰에서 “토론회에 참가한 우리들은 누가 잘했는지 알 수 없었다. 왜냐하면 브라운관을 통해 보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뼈있는 말을 했다.

시카고 시간으로 밤 8시반이었다. 사회자는 하워드 스미스, 4명의 언론사 기자가 패널로 참가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닉슨의 승리를 낙관했다. 부통령 닉슨은 웅변의 달인으로 명성을 날리고 있었으나 케네디 상원의원은 바람둥이 애송이로만 알려져 있었다. 그런데 그날밤은 모든 것이 이상했다. 겨우 40대후반인 닉슨은 매우 늙고 피로해 보였다. 반면 케네디는 구릿빛 건강한 얼굴에 젊음과 신념이 넘쳐 보였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짙은 색 양복을 입은 케네디의 모습은 화면에 또렷하게 부각됐으나 닉슨의 실루엣은 흐릿했다. 케네디가 시청자를 똑바로 응시하며 미국의 미래를 얘기하는 동안 닉슨은 옆얼굴로 나타나 “케네디의원의 말에 전적으로 공감한다”는 말을 되풀이했다.

토론회 다음날 오하이오주에서 유세를 한 케네디는 마치 ‘아이돌 스타’를 대하듯 열광하는 군중속에 휩싸였다. 워싱턴의 닉슨 선거운동본부에는 ‘미투(me too)’를 연발하는 ‘가짜 닉슨’의 정체를 벗기라는 전화가 쇄도했다. TV라는 마술상자가 빚어낸 결과였다.

닉슨은 베테랑 정치인이었지만 역사상 최대규모의 정치집회, 즉 TV토론회의 중요성을 깨닫지 못했다. 더구나 논리보다 이미지와 감성에 호소하는 TV를 어떻게 활용해야 하는지 알지 못했다. 참모들이 분장을 하라고 하자 닉슨은 거절했다. 케네디도 처음에는 거절했으나 조명으로 인한 얼굴 반사를 막고 땀구멍을 메워야한다는 참모들의 조언을 받아들였다. 피부가 투명한 닉슨의 얼굴은 토론회 내내 빨개졌다 창백해졌다 했으며 땀으로 얼룩져 ‘당황하고 피곤한 모습’을 보였다.

론회 직전에도 ‘사고’가 있었다. 닉슨의 TV대책반은 스튜디오 배경이 어둡다는 말을 듣고 닉슨에게 밝은 회색 양복을 입으라고 말해두었는데 정작 가보니 배경이 너무 밝았다. 그러나 하루종일 닉슨과 연락이 닿지 않아 참모들은 전전긍긍했다. 닉슨은 전날밤 늦게 시카고에 도착해 일체 외부와의 연락을 끊고 혼자 휴식을 취했기 때문이다. 2주간의 유세에 지친 닉슨을 더욱 피곤하게 한 것은 토론회 당일 목수조합원들 앞에서 한 연설이었다. 그 노조는 매우 적대적이어서 닉슨은 심리적으로 위축된 채 방송국으로 향했다.

반면 케네디는 토론회 전날 일찍 세명의 참모와 함께 시카고에 도착했다. 참모들은 24시간동안 예상질문과 답안을 만들었으며 이들은 함께 즐거운 리허설을 마쳤다. D데이에 호텔에서 달게 낮잠을 잔 케네디는 상쾌한 기분으로 토론장에 갔다. 프로듀서가 하얀 셔츠에 빛이 반사된다고 지적하자 케네디는 급히 호텔로 사람을 보내 푸른 셔츠를 가져오는 ‘성의’를 보이기도 했다.

토론중에도 케네디가 카메라를 보며 ‘전국민에게’ 이야기하는 동안 닉슨은 스튜디오에 함몰돼 ‘케네디와의 토론’에 온 정성을 다하는 어리석음을 범했다. 샌디 오커는 “당시 라디오를 들은 사람들은 닉슨이 잘했다고 했지만 TV를 본 대다수의 사람들은 케네디를 지지했다”고 회고했다. 케네디를 미숙한 정치 초년생이라고 생각했던 미국민은 TV토론회를 통해 그의 새로운 면을 보았다. “그때의 충격에 비하면 지금 TV의 영향력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24시간동안의 사소한 일들이 쌓여 역전의 드라마를 낳은 것이다.

TV토론회는 그후에도 워싱턴 뉴욕 등에서 모두 4회에 걸쳐 이뤄졌으며 1억1천5백만명의 유권자가 1번 이상 토론회를 시청했다. 선거후 CBS 여론조사에서 미국 투표자의 57%는 ‘토론회가 선택에 영향을 미쳤다’고 답했다. 6%, 즉 4백만명은 ‘토론회만으로 후보를 결정했다’고 답했고 그중 3백만명이 케네디를 지지했다. 개표 결과 케네디는 11만2천표차로 승리했다.

그후 여당 후보의 거부로 TV토론회가 열리지 못하다가 76년에 재개되었다. TV는 고비용 저효율의 선거문화를 대체할 수단으로 각광받게 되었다. 유권자들은 TV를 통해 후보들의 능력과 자질을 직접 판단하게 되었으나 이미지 조작이 가능한 TV선거의 폐해를 우려하는 목소리 또한 높다.

〈신연수기자〉ysshin@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