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타임스]'HP 女회장' 옹립엔 여성차별의 벽 허문 전임회장…

  • 입력 1999년 8월 26일 20시 14분


휴렛팩커드사는 지난달 여성인 칼리 피오리나를 회장 자리에 임명함으로써 남성 중심적인 기업 사회에서남녀평등의보루라는평판을 공고히 했다. 휴렛팩커드의 관리직 사원 중 4분의 1이 여성이고, 회장자리를놓고피오리나와 싸운 주요 라이벌 중의 한 명도 여성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휴렛팩커드에서는 여성 중역의 길을 막는 벽이 완전히 없어졌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듯하다.

그런데 이보다 더 놀라운 것은 그 벽을 무너뜨리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한 것이 중년의 백인 남자인 루이스 플래트(58)라는 사실이다. 그는 약 20년 전 아이를 혼자 키워야 하는 입장이 되기 전까지는 직장 여성의 입장에 대해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81년 그가 한창 상승세를 탄 중역이었을 때, 휴렛팩커드는 그의 표현대로 ‘백인 남자들의 천국’이었다. 회사 직원의 대부분은 검은 양복에 풀먹인 하얀 와이셔츠를 입은 공대 출신 남자들이었으며, 플래트 자신도 육아와 살림을 아내에게 맡겨두고 남성 중심적인 회사에서 일하는 것에 아무런 불만이 없었다고 했다. 그런데 아내 수잔이 암으로 세상을 떠나자 그는 갑자기 아침에 아홉살, 열한살의 두 딸을 학교에 데려다주고, 저녁에는 장을 봐서 저녁 식사를 준비하고, 아이들의 숙제까지 봐줘야 하는 입장이 되어버렸다.

플래트는 이런 생활을 힘겹게 이어나가면서 여성들이 직장에서 겪는 어려움은 모두 스스로가 자초한 것이라는 과거의 생각이 산산이 깨져나가는 것을 경험했다. 그는 “나는 휴렛팩커드에서 정말 일을 잘 하는 백인 남자였다. 그런데 갑자기 다른 역할이 내게 맡겨졌다. 나 역시 가사 일과 직장일 모두를 여성들보다 더 잘해낼 수는 없었다”고 말했다.

그는 한때 회사를 그만둘 생각까지 했지만 83년 두번째 아내 조앤과 결혼하면서 가사의 부담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그러나 그 후에도 직장 여성들의 고통을 이해하는 입장을 유지했다. 여기에는 조앤이 데리고 온 두 딸을 포함한 네 딸과 아내에게 둘러싸인 그의 가정 환경도 큰 역할을 했다. 그의 큰딸인 카린(29)은 “우리는 아버지에게 상당히 무자비한 공격을 가하곤 했다”고 회상했다.

플래트는 87년 부사장의 자리에 올랐고, 92년에는 회장이 되었다. 그동안 휴렛팩커드에서는 예전보다 더 많은 여성들이 관리직을 차지하게 되었지만 그들 중 최고 경영진의 자리까지 올라가는 사람은 없었다. 플래트는 자신이 아무리 개방적인 생각을 갖고 있어도 회사의 방침 자체가 여성들의 어려움을 해소해줄 수 있을 만큼 유연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는 행동에 나서기로 했다. 그는 수 년 동안 고위 중역들과 협력하여 유연 근무시간제를 도입하고, 필요한 경우에는 재택근무도 허용해주는 제도를 마련했다. 심지어는 아무런 조건이 없는 1년간의 무급휴가와 다른 직원과의 업무 공유도 인정했다. 그리고 사원들에게 이런 제도를 이용하도록 적극적으로 장려했다. 비슷한 제도를 지닌 회사는 지금도 많이 있지만 사원들에게 그런 제도를 이용하도록 장려하는 곳은 거의 없다.

그는 전세계의 지사장들에게 자신의 이름이 적힌 메모를 보내 “일과 가정 생활을 양립하도록 도와줌으로써 휴렛팩커드의 경쟁력이 강화되고 팀워크가 좋아진다”고 강조했다. 남성 직원들에게는 대부분의 여성들이 직장을 가진 남자들과 결혼하는 반면, 남성 관리직 사원 중 3분의 2가 전업주부를 아내로 갖고 있음을 끊임없이 상기시켰다.

플래트의 이러한 노력의 결과는 극적인 것이었다. 90년대 초에 여성의 이직률은 남성의 두 배였으나 지금은 남녀간에 거의 격차가 없다. 또한 남녀를 막론하고 전체 직원들의 이직률이 5%로 업계 평균 이직률 17%보다 낮다.

이제 연말에 플래트의 자리를 이어받게 될 피오리나는 성별 인종 나이에 관계없이 재능 있는 사람을 찾아내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플래트는 휴렛팩커드가 과거의 모습으로 돌아가지 않도록 하는 것은 이제 모든 직원들의 손에 달렸다고 말했다.

(http://www.nytimes.com/library/financial/08229glass―ceiling.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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