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정경준/금감위의 '증거인멸 행정'

  • 입력 1999년 8월 15일 19시 43분


수익증권 환매자금을 마련하느라 쩔쩔매는 투신권에 대한 긴급 유동성지원대책이 발표된 14일. 금융감독위원회 김종창(金鍾昶)상임위원과 기자들간에 실랑이가 벌어졌다.

“투자자들이 아직도 불안해하고 있다. 6개월을 기다리면 대우채권편입비율에 해당하는 금액의 95%를 확실히 받을 수 있는가.”

“그렇다.”(김위원)

“정부가 보장할 수 있는가.”

“…. 정부가 아니라 당해 회사가 협회를 통해 약속한 것이다.”

“만일 증권사나 투신사가 영업정지 등으로 약속을 못지킬 때는 어떻게되나. 정부를 믿고 그동안 환매를 자제한 일반 투자자들은 결과적으로 손해보는 것 아닌가.”

“우리는 개인고객에게 환매자제를 요청한 사실이 없다.”

김위원이 서둘러 자리를 뜨는 바람에 설전은 싱겁게 끝났다. 김위원의 짤막한 답변은 금융시장의 안정과 발전을 책임지고 있는 당국의 시각이 어떤 것인지를 단적으로 드러내주었다.

금감위가 12일 밤 투신사 환매대책을 발표하면서 ‘투신협회와 증권업협회의 건의를 수용’하는 형식을 취해 발표한 이유도 비로소 이해가 갔다. 한마디로 ‘금감위는 책임질 수 없다’는 것.

증거를 남기지 않으려는 금감위의 ‘종이없는(paperless) 행정’은 이미 유명하다. 4,5월 금감위 특감에 나섰던 감사원 직원들은 두 번 놀랐다고 한다. 적은 인력으로 엄청난 일을 하고 있는 것에 놀랐고 그렇게 많고 중요한 일을 하면서도 변변한 근거서류 하나없는데 놀랐다는 것.

툭하면 꺼내드는 ‘창구지도’도 구두로만 이뤄진다. 나중에 책잡힐 근거를 남기지 않으려는 때문은 아닐까. 믿음이 뒷받침되지 않는 금융시장은 모래 위에 지은 집처럼 위태롭기만 하다.

정경준<경제부>news91@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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