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밀레니엄/나치즘]英-佛, 나치 막을기회 여러번 놓쳤다

  • 입력 1999년 8월 15일 19시 43분


“이봐, 나는 절대로 살아선 여기를 나가지 않을 거야.”

33년 1월, 베를린 시내의 총리 관저에 들어서면서 히틀러는 운전사에게 이렇게 말했다.

히틀러 본인은 다른 의미로 한 말이었겠지만 그는 결국 이 ‘약속’을 지켰다.

12년 뒤 소련군에 의해 베를린이 함락되기 직전 그는 애인 에바 브라운과 함께 관저 지하 참호에서 자살했다. 두사람의 시체는 부하들에 의해 화장된다.

그의 말대로 끝내 산 몸으로 관저를 나가지는 않은 셈이다.

23년 뮌헨 폭동이 실패했지만 이후 나치스는 점차 전국정당으로 발돋움한다. 나치스의 집회에는 갈수록 수많은 사람들이 몰렸고 당원은 급팽창했다.

그로부터 불과 10년 뒤. 히틀러는 총리에 취임했다. 그것도 폭력이 아닌 합법적인 선거에 의해서였다.

이때 그의 나이 겨우 44세.

독일인도 아닌 오스트리아 출신에다 미술학교에 낙방해 빈 거리를 배회하던 부랑자. 특별히 내세울 학력이나 경력도 없는 전직 육군 하사. 이렇듯 보잘 것 없는 그가 어떻게 3500만 인구의 게르만 국가 수장에 오를 수 있었을까. 게다가 철학자 칸트와 헤겔을 낳은 ‘이성의 나라’에서.

그의 집권은 이런 점에서 ‘20세기의 불가사의’로 여겨지기도 한다. 그러나 어떻게 보면 당시의 독일인들은 ‘히틀러’ 같은 인물을 열렬히 찾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1차대전 패배 이후 베르사유 조약에서 부과된 가혹한 배상금 부담으로 엄청난 고통을 겪고 있던 독일인들은 히틀러를 통해 ‘옛 게르만의 영광’을 찾았다.

히틀러는 독일인을 상대로 집단최면을 걸었고 독일인들은 그 최면 속으로 스스로 걸어 들어갔다. 히틀러가 연단 위에서 공허한 눈으로 열변을 토할 때 독일인들은 그가 독일을 구할 구세주라는 환상에 빠졌다.

어떤 이는 그런 열광으로, 또 어떤 이들은 두려움으로 히틀러에게 복종했다.

히틀러는 정권 장악에 ‘주먹’과 선전술을 병행했다. 나치스의 무장 돌격대는 무자비한 테러로 반대파를 제거해 나갔다.

빈의 뒷골목 생활을 통해 대중의 부정적인 속성을 꿰뚫은 히틀러는 국민의 마음을 사로잡는 데 천재적인 능력을 발휘했다.

나치스의 집회는 사람들이 흥분하기 쉬운 밤 8시 이후에 주로 열렸다. 그 집회에서 나치스의 최대 무기는 정강 정책이 아니었다. 바로 히틀러의 카리스마적인 웅변술이었다.

히틀러의 연설은 송곳처럼 군중의 가슴 속을 파고들었다. 때로는 속삭이는 목소리로, 때로는 격정적인 어조로, 현란한 제스처를 써가며 말하는 그의 얘기를 듣고 있던 군중은 현재의 절망을 되씹고 그의 ‘아리안 민족주의’에 취했다.

‘시대’도 히틀러를 도와줬다. 30년대 대공황의 여파는 나치즘 성장의 최대 자양분이 됐다. 호황은 나치스에 고난의 시기였지만 실업자가 넘치고 굶주린 이들이 많을 때 히틀러와 나치스는 급성장했다.

그렇게 독일은 ‘히틀러의 나라’가 돼갔다.

33년 독일제국 수립을 선포한 히틀러는 “독일 제3제국은 앞으로 천년, 만년 이어질 것이다”고 선언했다.그리고즉시재무장에 나섰다. 히틀러는 이미이때부터 유럽정복의 야욕을 품고있었다.

그러나 독일의 군국주의화는 영국과 프랑스가 조금만 주의를 기울였더라면 막을 수 있었던 ‘예견된 사고’였다.

35년 독일이 베르사유조약에서 금지한 징병제도를 부활했을 때도 영국과 프랑스는 웬일인지 침묵했다. 1차대전으로 지친 이들 나라는 독일과 마찰을 일으킬 수 있는 것이면 그 어떤 것도 기피하려고 했다.

사실 이때만 해도 독일의 군사전력은 그리 강력하지 않았다.

36년 중립지대였던 라인란트를 편입했을 때 히틀러는 이렇게 털어놓았다.

“라인란트 점령 후의 48시간은 내 생애에서 가장 신경을 곤두세운 시간이었다. 만일 프랑스가 반격을 했더라면 우리 독일군은 그 즉시 퇴각해야 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당시 독일군은 아직 약체였기 때문이다.”

38년 체코 침공 전운이 짙을 때도 실책은 반복됐다. 히틀러가 “내가 원하고 있는 것은 평화다”라고 말하자 유럽은 이번에도 그의 말을 그대로 믿었다.

아니 그대로 믿고 싶어했는지도 모른다.

결국 영국과 프랑스 등의 이같은 방조가 독일을 ‘호랑이’로 키웠던 셈이다.

2차 대전 종전 후 많은 사람들은 ‘나의 투쟁’을 꼼꼼히 읽고는 한탄했다.

“전쟁 전에 이 책을 제대로 읽기만 했더라면….”

거기에는 유럽을 집어삼키려는 히틀러의 계획이 속속들이, 노골적으로 표현돼 있었다. 아우슈비츠 학살도 그런 점에서 피할 수 있었던 ‘비극’이다.

“우리는 유태인을 파멸시킬 작정이다. 보복할 날은 다가오고 있다.”

‘나의 투쟁’ 곳곳에는 이런 끔찍한 문구들이 가득했다. 이 살벌한 표현들에 인류가 조금만 주목했더라면 600만명의 희생자는 훨씬 줄었을지 모른다.

〈베를린〓이명재기자〉mj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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