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밀레니엄/나치즘 흥망]히틀러 의문의 최후

  • 입력 1999년 8월 15일 19시 43분


베를린 중심가에는 히틀러가 최후를 맞은 지하 참호 잔해가 아직 남아 있다. 옛 총통 관저의 지하였다는 이 참호의 1.8m 높이 벽에는 히틀러와 나치스 시대의 기록과 사진들이 붙여져 있다. 일종의 ‘노상 기념관’ 역할을 하고 있는 셈.

히틀러는 이 곳에서 45년 4월30일 자살할 때까지 3개월째 대피생활을 하고 있었다.

히틀러는 도피냐, 자살이냐를 놓고 부하들과 논의한 끝에 선전상 괴벨스의 의견을 받아들여 자살하기로 결심했다.

자살 전날인 4월29일 히틀러는 애인 에바 브라운과 결혼식을 올린다. 전투중이던 사병을 한명 불러 주례를 맡겼다.

결혼식 직후 히틀러는 유서를 작성한다.

유서는 ‘정치적 유서’와 ‘개인적 유서’로 나눠졌다.

개인적 유서는 “나와 아내는 타도되거나 항복하는 치욕을 피하기 위해 스스로 죽음을 택한다. 우리의 유해는 내가 12년간 우리 민족에 봉사하기 위해 매일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던 장소에서 즉시 화장될 것을 원한다”고 끝맺고 있다.

마지막 날인 이튿날. 점심식사를 마친 히틀러 부부는 부하들과 작별인사를 나누고 에바와 함께 자신의 방으로 들어간다.

오후 3시반경 총성이 울렸다. 부하들이 방으로 들어가보니 히틀러 부부는 소파에 앉은 채 나란히 죽어 있었다.

두사람의 시신은 유언에 따라 불에 태워졌다. 히틀러는 소련군이 시체를 훼손할까 우려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같은 참호 생존자들의 증언은 오랫동안 의문을 샀다. 무엇보다 연합국측이 그의 시신을 직접 확인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특히 소련측은 히틀러가 “죽지 않고 도주했다”며 의심을 풀지 않았다. 독일 국민 사이에서도 생존설이 퍼져 나갔다. “다른 사람을 대역으로 삼았다”는 그럴듯한 추측까지 나돌았고 히틀러를 봤다는 목격자가 나타나기도 했다. 지금도 히틀러의 최후는 완전히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83년에는 히틀러의 가짜 일기장 소동이 빚어졌다. 서독 슈테른지가 “히틀러의 32∼45년 일기장”이라며 이를 게재했다. 그러나 이 일기는 2주만에 가짜로 판명됐고 책임 편집장과 기자가 형사처벌됐다.

그런가하면 몇년 전에는 히틀러의 아들이 살고 있다는 뉴스가 독일의 신문에 실리기도 했다. 그러나 이 역시 진짜인지 확인은 되지 않았다. 히틀러는 죽어서도 많은 이야기를 남기고 있다.

〈베를린〓이명재기자〉mj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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