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경택칼럼]民心이 天心이라면서

  • 입력 1999년 8월 6일 19시 05분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고뇌의 결단이 있기까지 자초지종을 국민 앞에 솔직히 털어놓고 대(對)국민사과에 주저하지 않은 김(金)대통령의 결단과 용기를 높이 평가하고자 한다.’

이 글은 동아일보 사설의 한 대목이다. 제목은 ‘대통령의 사과와 결단’. 독자들은 착오없기 바란다. 글 중 김대통령은 DJ(김대중)가 아니다. YS(김영삼)이다. 이 사설이 나간 것은 93년12월10일자. YS는 바로 전날인 12월9일 TV와 라디오로 생중계되는 가운데 ‘쌀시장개방 저지’라는 대선(大選)공약을 지키지 못한데 대해 국민 앞에 사과했다. 그는 담화문을 읽어가는 16분동안에 ‘사과’ ‘죄송’ ‘죄책감’이란표현을 여섯번이나 썼다.

▼ 누가 더 정직한가 ▼

87년 대선때 노태우후보도 선거전이 과열되자 급한 마음에 ‘임기중 중간평가 실시’를 공약으로 내걸었다. 지켜질 수 없는 약속이었다. 그는 89년 3월 ‘중간평가와 관련하여 국민여러분께 드리는 말씀’을 통해 중간평가를 실시할 수 없는 사정을 소상히 설명했다.

선거전이 치열해지면 실현 불가능한 것도 공약이라는 이름으로 그럴듯하게 포장돼 나올 수 있다. 또 당시에는 실현 가능성이 있어보이던 것도 사정이 달라지면 못지킬 수 있다. 문제는 위약(違約)에 있는 게 아니라 그 공약을 진실된 것으로 믿고 표를 준 국민에게 어떤 마음자세로 사과하고 용서를 구하느냐는 것이다. 그것은 곧 그 정치인 또는 그가 속한 정치집단의 정직성 도덕성의 잣대가 된다.

그런데 DJP(김대중―김종필)는 대선공약인 ‘99년말까지 내각제개헌 완료’를 지키지 못하게 됐다면서도 사과다운 사과를 했는가. 하지 않았다. JP는 기자회견(7월21일)에서 연내개헌불가 이유라며 몇가지를 얘기했지만 ‘사과’는 없었다. DJ는 그 다음날 지방나들이를 하던중 ‘유감스럽게 생각한다’고만 했지 ‘사과’는 안했다. 공약으로 내걸 때는 ‘합의문에 사인하고 칵테일 마시고 기념사진까지 찍더니…’(자민련 이원범의원의 국회발언) 그 공약을 깨면서는 겨우 ‘유감’ 표명정도다.

공약의 성격은 다르나 그 비중은 노태우후보의 ‘중간평가 실시’나 김영삼후보의 ‘쌀시장개방 불가’공약만 못하지 않은 게 내각제개헌 공약 아닌가. 그렇다면 ‘국민에게 드리는 사과의 말씀’ 정도의 담화문은 있을 법도 한데 말이다.

국민회의와 청와대는 요즘 ‘3김 차별론’을 선전한다. 그들 주장대로 ‘환란의 주범’인 YS와 ‘환란 극복자’인 DJ를 같이 비교할 수는 없겠으나 다른 측면에서는 서로 장단점이 있을 수 있다. 그중 국민에게 누가 더 솔직했는지, 누가 국민과의 약속을 더 많이 어겼거나 거짓말을 많이 했는지를 따져보는 항목이 있다면 어떤 대답이 나올까.

▼ '不可 不可' ▼

겨우 한달여전 ‘국민의 뜻을 하늘같이 여긴다’고 했던 김대통령이 민심이나 여론을 애써 외면하거나 거스르는 경우를 ‘김현철씨의 사면 드라마’에서 본다. 김씨의 사면에 대한 청와대의 공식 대답은 아직도 ‘검토중’이다. 그러나 최근 벌어지고 있는 어설픈 ‘드라마’를 보는 국민은 김씨가 결국 이번 8·15에 사면된다는 것을 쉽게 짐작한다.

상도동과 여권이 교감은 없었다면서도 김씨는 대법원에 내놓은 상고를 취하해 사면의 전제조건인 형확정절차를 밟고, 검찰은 형이 확정되면 신속히 절차를 밟아 수감해야 하는데도 전례없이 미적거린다. 도대체 상고를 취하하면 사면이 없는 한 징역을 다시 살아야 된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 ‘사전교감’ 없이 취하서를 내는 바보가 어디 있겠는가.

사면의 ‘불가(不可)’ 이유를 되뇌고 싶지는 않다. 다만 딱 한가지 김대통령께 묻고 싶은 게 있다. 자신이 강조한 민심(民心)은 천심(天心)이라고 한 민심의 소재를 알면서도 그것을 거스른다면 그것보다 더 중하게 여기는 가치가 무엇이냐고. ‘화해’ ‘화합’ ‘포용’ ‘자식 둔 아버지의 심정’ 등의 대답이 청와대 주변에서 들려온다.

정말 이런 이유 때문일까. 아니다. 절대 아니다라는 것을 말없는 국민은 다 안다. 명분 뒤에 숨은 ‘정치적 계산’을 모를 리 없다.

그러나 DJ가 정말 ‘정치9단’이라면, 또 그의 주변에 제대로 입바른 소리를 할 줄 아는 사람이 한명이라도 있다면 김현철씨사면은 ‘不可不 可’가 아니라 ‘不可 不可’라는 결론이 나올 것이다. 그렇게 될 것으로 믿는다.〈논설실장〉

euhk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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