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밀레니엄/독일재통일]‘베를린 장벽’붕괴 뒷얘기

  • 입력 1999년 8월 4일 19시 41분


브란덴부르크문 주변은 삽시간에 수많은 사람들로 덮였다. 밤 11시. 쌀쌀한 초겨울 날씨였지만 흥분한 사람들이 내뿜는 입김이 차가운 밤 공기를 달궜다.

사람들은 한동안 감히 장벽 쪽으로 접근하지 못했다. 장벽 앞에는 총을 든 경비병들이 꼿꼿이 서서 지키고 있었다. 그러나 머뭇거리던 군중은 점차 과감한 행동을 보이기 시작했다. 한두명이 조심스레 장벽 위로 올라갔다.

그런데….

거짓말 같은 일이 눈앞에서 벌어졌다. 지난 수십년간 그랬던 것과 달리 경비병들의 총질이 없었다. 군중 사이에서 일제히 환호성이 터져나왔다. 그때까지 주저하던 사람들이 일시에 담쪽으로 달려갔다.

폭 50㎝도 안되는 장벽 위는 금세 사람들로 발디딜 틈이 없었다.

61년 이후 베를린, 아니 세계를 동서로 갈라왔던 베를린 장벽은 이렇게 무너졌다. 2차대전 종전 이후 44년간 분단됐던 ‘두 세상’은 하나가 됐다.

89년 11월9일 밤. 28년간 동서 냉전의 상징으로 버텨오던 콘크리트 담장이 허물어지는 데는 채 몇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장벽의 붕괴는 아무도 예기치 못했던 일이었다. 동독 정부의 방침에 의한 것도 아니었다. 그보다는 사소한 ‘착오’라고 할 수 있는 발언 하나가 초래한 결과였다.

발단은 이날 저녁 기자회견에서 비롯됐다. 연일 계속되는 개혁 요구 시위에 동독 공산당은 이날 오후 중앙위원회의를 열고 파격적인 조치 한가지를 의결했다.

바로 ‘서독으로의 여행 자유화’. 다음날부터 비자를 신청하면 누구나 서베를린으로 갈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동베를린 공산당 당수 귄터 샤보브스키가 이를 발표하기 위해 이날 저녁 7시 프레스 센터의 서방기자들 앞에 나타났다.

‘미스터리’는 바로 이때 벌어졌다. 샤보브스키는 여행자유화의 발효시기를 ‘내일부터’가 아닌 ‘바로 지금부터’라고 발표해버렸다. 거듭되는 기자들의 확인 질문에 샤보브스키는 “즉시”라는 말을 반복했다.

과연 이건 샤보브스키의 착각이었을까. 샤보브스키는 뒷날 “누군가 내게 쪽지를 갖다줘서 그대로 읽었을 뿐”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누가 쪽지를 전달했는지, 그 쪽지에 정말 샤보브스키가 말한대로 적혀 있었는지는 지금도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혹자는 자유분방한 성향인 샤보브스키의 우발적 ‘실수’였다는 주장을 제기하기도 한다. 설사 그랬더라도 자신의 발언이 장벽의 붕괴로 이어질 것이라고는 샤보브스키도 전혀 예상치 못했다. 그는 여행 즉각 자유화를 밝히면서도 “동독이 조만간 장벽을 허물 일은 없을 것”이라고 못박았다. 그의 발언은 관영 ADN을 통해 동독 전역에 알려졌다. 동베를린 주민들은 믿을 수 없는 뉴스에 “직접 한번 가서 확인해보자”며 경계선으로 몰려들었다.

그러나 장벽 경비병들은 이때 아무런 지시도 받지 못한 상태였다. 여전히 무장을 풀지 않았고 탈주자를 막으라는 명령은 계속 유효했다. 장벽을 넘으려는 사람이 있으면 평소처럼 발포를 해야 할 상황이었다. 운집한 군중과 경비병간에는 긴장이 흘렀다. 그러나 군중의 규모가 커지면서 그 기세는 점점 꺾기 힘들게 됐다. 경비병들은 감히 무기를 꺼낼 수가 없었다. 불가항력이었다.

장벽 맞은편 서베를린 쪽에도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장벽 위에서 만난 동서 베를린 시민들은 서로 껴안고 박수를 쳤다.

다음날 아침 아나운서가 흥분한 목소리로 간밤의 ‘사건’을 전했고 장벽을 향한 ‘대이동’이 시작됐다. 동베를린뿐만 아니라 동독 각지의 주민들이 장벽으로 몰려들었다.

수일 동안 거대한 행렬이 강물을 이뤘다. 국경을 넘는 것에서 나아가 사람들은 장벽을 손이나 기계로 부숴버렸다.

‘라인강의 기적’에 이은 ‘슈프레강(베를린 시내를 흐르는 강)의 기적’은 이렇게 찾아왔다.

당시 현장을 지켜봤던 이봉희(李鳳熙·63·베를린 교포)박사는 “무너진 장벽을 보며 세상이 하룻밤새 이렇게 변할 수 있는가라고 수없이 자문했다”고 회상했다.

베를린 장벽의 붕괴에 샤보브스키의 착각이 ‘갑작스러운’ 계기를 제공했다면 빌리 브란트 서독 총리의 동방 정책 이후 계속된 동서독간의 교류와 화해는 ‘필연적인’ 배경이 됐다. 또 85년 미하일 고르바초프의 집권 이후 불었던 동구권의 개혁 개방 무드도 원인(遠因)이었다. 서독 자본주의 바람에 철저히 방어벽을 치던 동독도 87년 서독 TV시청을 허용하는 등 자유화 제스처를 취할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 89년 10월 동독 제2의 도시 라이프치히를 중심으로 한 민주화 요구 시위, 폴란드와 체코를 경유한 탈출 물결이 불을 댕겼다.

그러나 장벽 자체의 붕괴, 더더구나 돌연한 붕괴는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일이다.

불과 몇달 전 에리히 호네커 동독 서기장은 “자본주의 사회의 불합리가 없어지지 않는한장벽은앞으로 100년은 더갈 것이다”라고호언장담했던터였다.

장벽붕괴 후 통일까지의 과정은 전광석화처럼 진행됐다. 장벽이 허물어진 지 1년도 되지 않은 90년 10월3일, 동서독은 마침내 통일을 이뤘다.

〈베를린〓이명재기자〉mj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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