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밀레니엄/중국 공산화]인민신뢰 업고 28년만에 성공

입력 1999-07-25 20:02수정 2009-09-23 2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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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공산혁명은 극적인 사건들의 연속이었다.

21년 상하이(上海)에서 중국공산당 창당대회가 열렸을 때 참석자는 단 13명. 마오쩌둥(毛澤東)도 그중 한사람이었다.

총당원은 57명이었지만 노동자는 4명에 불과했고 나머지는 지식인거나 자유직업 종사자들이었다. 소수의 급진적인 지식인 정당에 불과했다는 얘기다. 아마도 창당대회 참석자들조차 중국 대륙이 그 후 28년만에 공산화되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공산당은 국민당 지도자 쑨원(孫文)의 후원을 업고 세력을 확장해나갔다. 그러나 쑨원의 사망으로 공산당은 국민당 정부의 탄압을 받는다.

27년 장제스(蔣介石)가 상하이에서 반공쿠데타를 일으키며 난징(南京)에 국민당만의 단독정부를 수립하자 공산당은 도시를 떠나 농촌으로 파고들었다. 활동 무대를 도시에서 농촌으로 옮긴 것이다. 농촌 각지에 흩어진 공산당은 농민과 함께 생활하면서 홍군(紅軍)을 육성하고 소비에트 정권을 수립했다. 토지혁명으로 농민들의 지지를 얻어나갔다.

그러나 35년 장제스가 열강의 원조를 받아 소비에트 공화국을 공격하자 홍군은 근거지인 강시(江西)성 루이진(瑞金)을 포기하고 산시(陝西)성 옌안(延安)까지 이동한다. 국민당 군대에 쫓겨가면서 2만5000리를 답파하는 동안 홍군의 병력은 10만명에서 7000명으로 줄어든다. 악전고투였다.

하지만 홍군은 이 과정에서 병력보다 훨씬 소중한 중국 인민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참다운 인민의 군대’임을 자부하며 ‘인민으로부터 바늘 하나 실 한오라기도 취하지 않는’ 홍군의 도덕적 기율은 부패한 국민당 군인들에게 진절머리가 나 있던 인민들을 자기편으로 만들었다.

이때 인민들에게 홍군이 심어준 인상은 지금도 인민군에 대한 절대적인 사랑과 신뢰로 남아 있다. 시안(西安)사건으로 기사회생한 공산당은 중일전쟁을 거치면서 기력이 쇠진한 국민당 정부를 마침내 몰아낸다. 썩을대로 썩은 국민당 내의 부패도 자멸요인으로 작용했다.

49년 10월1일 톈안(天安)문 종루 위에 오른 마오쩌둥은 광장을 메운 수백만 인민과 홍군에게 ‘중화인민공화국의 탄생’을 선언했다. 두달 뒤 국민당 정부는 패잔병처럼 대만으로 쫓겨나고 만다. 중국의 100위안짜리 지폐에는 공산혁명의 ‘1등공신’이랄 만한 4명의 얼굴이 나란히 새겨져 있다. 마오쩌둥 저우언라이(周恩來) 주더(朱德·홍군 총사령관) 류사오치(劉少奇). 이들이 바로 오늘의 사회주의 중국을 있게 한 인물이다.

〈이명재기자〉mj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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