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걸 스탠더드]법정으로 몰려오는「Y2K」책임분쟁

  • 입력 1999년 5월 14일 10시 41분


97년7월 미국 미시간주 ‘프로듀스 팰러스’ 식료품점에서 3년전에 구입한 금전등록기가 말썽을 부리기 시작했다.

유효기간이 00년(2000년)인 신용카드를 1900년으로 인식해 거래를 승인하지 않았다. 밀레니엄 버그(Y2K·컴퓨터 2000년 연도 인식 오류)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이 금전등록기는 유효기간이 2000년 이후인 신용카드를 모두 유효기간이 지난 신용카드로 인식했다.

기술자들이 달려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동안 고객들은 짜증을 내며 가게에서 나가버렸다. 이 가게 주인은 제조업체에 2백차례 이상 교환을 요청했지만 응답이 없었다. 결국 제조업체와 판매업체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했다. 전세계에서 Y2K문제와 관련돼 제기된 첫 소송이다. Y2K문제가 기술적인 문제에서 법률적인 문제로 비화되는 순간이기도 했다. 결국 이 식료품점은 98년7월 35만달러를 배상받았다.

이 사건 이후 Y2K 문제 관련 소송이 봇물 터지듯 늘어났다. 테린 리드&프리스트 등 미국의 대형 법률사무소에 따르면 Y2K문제 관련 소송은 올들어 3월말 현재 미국에서만 80건 가량 제기됐으며 이중에는 7백50만달러(90억원)짜리 대형 소송이 포함돼 있다.

전문가들은 2000년에 이르면 소송이 폭발적으로 늘어날 것으로 보고 있다. 소송의 취지는 제조업체가 Y2K 문제를 사전에 알면서도 문제를 해결하지 않은 채 제품을 생산해 신의 성실의 원칙을 어겼다는 것이다.

미국 상공회의소는 Y2K 문제와 관련된 소송 규모가 미국과 캐나다에서만 1조∼3조달러에 이를 것으로 추산한다. Y2K문제를 기술적으로 해결하는데 소요될 것으로 추산되는 3천억∼6천억달러보다 훨씬 많다.

2000년1월1일이 되기 전에는 누구도 알 수 없지만 전문가들은 Y2K문제가 전 세계를 대재앙으로 몰고 갈 가능성은 적은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컴퓨터 칩이 내장된 엘리베이터 의료기기 미사일 발전기기 도난방지시스템 교통시스템 가전제품 항공관제망 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곳에서 Y2K 사고가 발생할 가능성이 있다.

가령 생명이 위독한 환자가 수술도중 의료기기에서 발생한 Y2K문제로 수술이 잘못돼 사망한다면 누가 배상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남게 된다. 병원은 의료기기 제조업체에 책임을 떠넘길 것이다. 제조업체는 계약서상에 Y2K문제를 언급한 조항이 없는 만큼 병원에서 전적으로 책임질 문제라고 맞설 것이다.

결국 법원이 병원과 제조업체중 누가 얼마만큼 배상할 것인지를 판가름할 수밖에 없다. 실제로 보건복지부는 작년부터 최근까지 전국 종합병원의 의료기기 3천6백개를 점검한 결과 1천1백개에서 Y2K문제가 발생했다고 발표했다.

전세계가 무역과 정보통신망으로 긴밀히 연결돼 Y2K 문제는 국제소송으로 비화될 성격이 짙다.

삼성전자는 올들어 씨티뱅크 인텔 IBM 제너럴일렉트릭(GE) 등 50여 외국금융기관과 기업으로부터 Y2K문제가 어느 정도 해결됐느냐는 문의를 받았다. 질문 내용이 워낙 구체적이어서 삼성전자는 답변서를 작성하느라 곤욕을 치렀다. 인텔과 IBM GE 등 삼성전자와 거래가 많은 업체는 직접 전문가를 보낼 정도로 집요했다.

Y2K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배정한 예산은 어느 정도 규모인가? 하청업체에 대한 지원은 어느 정도이냐? 수많은 질문 중에서도 핵심은 삼성전자와 거래도중 Y2K문제로 손해가 발생했을 때 손해배상을 어떻게 하겠느냐는 것이다.

㈜동방 관계자는 “최근 일본 후지은행 등 외국 금융기관으로부터 Y2K문제와 관련된 질문을 많이 받았다”며 “일부 거래 업체는 Y2K문제로 인해 채권 채무 기록 등에 오류가 생길 경우 (배상)책임을 진다는 보증까지 요구했다”고 말했다.

황보영(黃寶榮)변호사는 “외국 업체들은 이처럼 배상책임을 명확히 해놓고 가령 삼성전자가 납품한 제품에서 문제가 발생해 소비자가 소송을 제기하면 배상 책임을 삼성에 떠넘길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은 이미 Y2K 문제와 관련해 단순히 기술적인 대책 마련 차원을 넘어 법률적인 대비를 진행하고 있다. 미국은 작년 10월 정보공개와 교환을 통해 Y2K문제 해결을 앞당기려는 취지에서 ‘2000년 정보 및 준비공개법’을 제정했으며 올들어서는 Y2K관련 소송의 범위와 손해배상액의 한도를 정하는 특별법을 의회에서 논의중이다.

특히 이 특별법은 업계의 존망과 직결돼 로비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거세다. 미 제조업체연합회와 은행연합회 보험연합회 정보기술연합회 등 미국 재계를 대표하는 50여개의 업계 이익단체가 연대해 의회를 상대로 로비전을 벌이고 있다.

한국은 아직까지 Y2K 문제를 다루는 법률조차 없다. 대통령령으로 공포된 ‘컴퓨터 2000년 문제의 해결을 위한 대책수립 및 지원 등에 관한 규정’이 전부다.

업계도 법률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무지한 실정. 울산 모 병원은 얼마전 스웨덴에서 3백만달러짜리 감마레이저를 구입했으나 뒤늦게 이 의료기기가 Y2K문제를 해결하지 않은 것임을 발견하고 제조업체에 수리를 요구했으나 거절당했다. 계약서상에 Y2K문제가 언급되지 않았다는 것이 거절 이유였다. 결국 이 병원은 30만달러를 지불하고 수리를 마쳤다. Y2K 문제를 마치 강건너 불구경하듯이 한 결과였다.

이후동(李厚東)변호사는 “기업 병원 정부 학교 등 Y2K관련 소송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분야가 없다”면서 “각종 계약을 체결할 때는 반드시 Y2K문제를 유의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이희성기자〉leehs@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