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고승덕씨의 사퇴를 보며

  • 입력 1999년 4월 29일 19시 28분


서울 송파갑구 국회의원 재선거(6월3일)를 앞두고 한나라당이 후보로 확정 발표한 고승덕(高承德)변호사가 29일 당적을 버리고 후보를 사퇴했다.

그의 후보 사퇴를 위해 장인인 자민련의 박태준(朴泰俊)총재가 적극 나서고 사퇴성명도 자민련 당사에서 발표한데 대해 한나라당이 ‘외압에 의한 것’이라며 송파갑 재선거를 보이콧할 태세를 보이는 등 파문이 커져 정치권이 급랭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다.

고승덕씨의 사퇴과정에서 우리는 이른바 ‘젊은 피’의 허상을 보는 것만 같아 씁쓸하다. 우선 TV프로를 통해 대중적 스타 반열에 오른 고씨가 국민회의 당사를 기웃거리다, 어느날 갑자기 장인의 정치적 카운터파트인 한나라당에 입당, 거기서 국회의원 후보로 나서겠다는 것부터가 극적인 반전(反轉)처럼 보였다.

그러다 결국 ‘혈연이란 극복할 수 없는 것’이라는 한마디를 남기고 눈시울을 적시며 한나라당을 등졌다. 정치 소극(笑劇)이라 치더라도 너무 치졸해 보인다.

그는 ‘젊의 피’로 꼽힐 만한 요소들을 두루 지니고 있었다. 신세대 유권자의 인기를 얻을 만한 적당한 순발력과 언변과 이미지가 있다. 사법시험을 통과해 전문성을 상징하는 변호사 자격도 있고 미국 변호사 자격을 따 뉴욕의 변호사사무소에 근무한 적도 있다.

학력도 유명 고교와 대학을 나왔고, 미국에서도 유명한 하버드대학 등을 두루 다니며 석사 박사학위를 받았다고 스스로 이력서에 적고 있다. 행정고시에는 수석합격, 외무고시에는 차석합격했다고 한다.

고씨의 이력서 상의 기록만으로는 어떤 젊은 피도 경쟁조차 될 성 싶지 않다. 그러나 그런 조건을 두루 구비한 고씨가 보여준 공천에서 사퇴까지의 과정은 앞으로 정치권의 젊은 피 수혈에 적지 않은 시사(示唆)를 주고 있다.

정치권은 나이 외모 언변 재주 이력서같은 조건이 신인에게 필요할 수 있겠으나, 그보다도 공적 소임을 맡기 위해 일정한 지향성(指向性)을 갖고, 그것을 위해 끝까지 자신을 희생하더라도 관철하겠다는 뚜렷한 철학, 줏대와 도덕적 무장이 젊은 피의 충분조건임을 배워야 할 것이다.

한편으로 사위인 고씨의 후보사퇴에 작용한 장인 박총재의 역할도 논란거리다. 여당총재라는 이유로 장성한 사위의 정치적 선택을 ‘가족적 문제’로 접근하고 호소한 것은 전근대적이라는 비판을 면치 못할 것이다.

상대 정당이 정해놓은 후보를 가족이라는 이유로 끌어내려 타격을 주고, 결과적으로 국회운영 경색에다 재선거 보이콧 파문까지 몰고온 것은 제가(齊家)도 그르치고 평천하(平天下)도 실패했다는 비난을 받을 수 있다.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