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인생의 책]강우방/밑줄쳐가며 읽은「삶의 계시록」

  • 입력 1999년 4월 16일 18시 38분


대학에 갓 들어가면서 나에게 깊은 영향을 준 것은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의 ‘자서전’이었다. 원제는 영어로 ‘Safe conduct’(안전운행중). 혁명의 회오리 속에서 그가 어떻게 안전하게 살아남으며 작품을 썼는가 하는 과정을 매우 차분하게, 서정적 분위기로 서술한 책이다.

현실에 직접 참여하지는 않았으나 그 격동의 시간을 응시하며 그는 오히려 역사의 위대한 증인이 되길 선택했던 것이다. 대학에 들어가자마자 4·19가 일어났으나 나는 자아의 문제에 몰두해 있었다.

도서관 밖에선 늘 데모의 함성이 끊이지 않았다. 파스테르나크가 독일어로 쓴 시를 외어 읊었고 화가인 그의 아버지가 아들과 함께 독일로 갔을 때 그린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초상화를 사진틀에 넣어 책상 위에 놓아 두었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미술사 공부를 시작할 즈음 읽은 책은 독일 철학자 에른스트 카시러의 마지막 저서 ‘인간론’이었다.

카시러는 유태인에 대한 나치의 박해로 외국을 떠돌았다. 그는 독일 관념론을 인간의 모든 경험의 영역으로 확대하여 ‘문화의 비판’으로서의 철학을 정립하려 했다.

나는 그의 사고방식에 매료되어 중요한 대목마다 줄을 긋고 번호를 붙여가며 미술사 방법론의 기본으로 삼으려 했다. 다시 반복하지는 않았으나 내가 동의한 것들이니 무의식 중에 살아 남았으리라 확신한다. 어떤 학문 분야든 필독서일 것 같아 그 당시 문학평론가로 이름을 날리기 시작한 친구 김현에게 일독(一讀)을 강력히 권했었다.

요즘엔 김혈조교수(영남대)가 번역한 연암 박지원의 산문집 ‘그렇다면 도로 눈을 감고 가시오’와 ‘열하일기’를 읽고 있다. 번역이 너무도 훌륭해 연암의 목소리가 그대로 들리는 듯하다. 우리에게 이처럼 훌륭한 사상가이자 문장가가 또 있었던가. 감동을 넘어 숙연하게 만든다. 그의 글에서 격조 높고 날카로운, 천하대세에 비추어 웅변하는 서릿발같은 비판정신을 배운다. 김홍도가 우리 서민의 삶을 그림으로 묘사하고 있었을 때, 비슷한 연배인 연암은 뛰어난 문체로 서민들의 삶을 묘사하고 있었다.

나는 많은 책에서 어떻게 살고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무엇을 할 것인가를 배운다.

책을 선택한다는 말은 있을 수 없다. 우연히 발견해 필연으로 삼을 뿐이다. 그 때의 기쁨이란! 나 자신이 뭔가 갈구하지 않으면 어떤 책이든 응답해주지 않는다. 좋은 책은 정독해야 한다. 읽으면서 책과 함께 살고, 함께 생각하고, 함께 대화해야 한다.

강우방<국립경주박물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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