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강한섭/할리우드 이긴 「토종 물고기」

  • 입력 1999년 3월 4일 19시 37분


충무로가 할리우드를 이겼다. 제작비 25억원을 들인 한국형 첩보액션 영화 ‘쉬리’가 1천5백억원의 제작비를 쏟아부은 할리우드산 블록버스터 영화 ‘타이타닉’의 한국 흥행기록을 앞서 나가고 있는 것이다.

‘쉬리’ 열풍으로 전국이 흥분하고 있다. 국가정보원의 시사회에서는 직원들의 기립박수를 받았고 국방부장관은 감동한 나머지 이 영화를 국군장병 교육용 자료로 채택하라고 지시했다.

▼한국영화 사랑 확인

한편의 영화가 신문 문화면을 넘어 사회면의 머릿기사와 시사주간지의 표지를 장식하는 사회적 신드롬(현상)으로 발전됐다.

쉬리 회오리의 원인을 분석하려는 호사가들의 관심이 뜨겁다. “한국형 액션영화라는 새로운 장르 전략이 주효했다.” “그보다는 설 연휴의 개봉 시점이 결정적이었다.” “아니다.

한석규 카드의 승리다.” “영화도 스타들의 연기도 그저 그런데 광고전략이 뛰어났다.” “아니다. 역시 영화가 좋았다.” “아니다.” “그렇다.” “아니다.” “그렇다….”

전문가들의 견해가 너무 분분해 정확한 ‘쉬리 회오리’의 이해가 더욱 어렵다. 이런 때는 오래 전부터 내려오는 영화업계의 금언에 미뤄버리는 것이 좋다.

‘흥행실패의 이유는 누구나 알고 성공의 원인은 아무도 모른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필자도 잘 모르겠다.

‘쉬리 현상’은 아무래도 미시적인 영화 분석과 흥행전략의 범주를 뛰어넘는 것같다. 국제통화기금(IMF) 시대를 살아가는 위기의 한국사회와 그로 인해 정신적 트로마(외상·外傷)의 충격을 받은 한국인과 관련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날벼락같았던 IMF 환란으로 선진국 진입의 꿈을 접어버린 지 만 1년. 역동성에서 세계 으뜸을 자랑하는 한국인들은 좌절을 딛고 ‘우리는 극복할 수 있다’의 새로운 목표의식을 만들어 냈다.

이것이 시민운동으로 확산된 ‘스크린쿼터 사수’ 운동과 결합돼 관객들의 열렬한 한국영화 사랑으로 나타났다.

‘빨리 빨리’의 생활 철학을 지닌 한국인들은 이제 겨우 경제위기 터널의 중간을 통과하고 출구의 희미한 불이 보이는 시점에서 성급하게 ‘우리는 해냈다’는 성취감을 맛보고 싶은 조급증에 사로잡혀 있다.

그러한 성급한 대중적 기대가 신드롬을 제조하고 싶은 매스미디어의 ‘쉬리 만세’, ‘아직도 쉬리 보지 않았니?’ 등의 보도와 결합돼 폭발적인 사회현상으로 나타난 것은 아닐까.

▼지나친 흥분은 금물

그러나 지나친 흥분은 금물이다. ‘쉬리’의 드라마는 첩보와 액션 그리고 멜로를 상식적인 수준에서 결합한 정도다.

기술적 완성도는 국제 수준과 비교해 겨우 아기 걸음마 정도다.

게다가 ‘쉬리’의 흥행 폭발이 한국영화산업 발전에 반드시 유리할까. 한편의 한국영화가 흥행에 성공하면 관객들의 한국영화에 대한 관심을 높이는 ‘동반상승 효과’가 따를 수 있다.

그러나 ‘쉬리’같은 영화가 전국적으로 3백만명의 관객을 동원하게 되면 ‘일등이 시장을 석권하는’ 시장독점의 부정적인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

물론 ‘쉬리’가 남북의 첨예한 대립을 소재로 한 매력적인 대중영화임을 부인할 수는 없다. 그것을 고집스럽게 성사시킨 강제규감독의 선구자적 노력은 감동적이기까지 하다.

쉬리는 맑은 물에만 사는 토종 물고기다. 강감독은 그 토종 물고기가 할리우드 영화를 이기는 신기를 가지고 있음을 우리에게 보여 주었다.

이 토종 물고기를 넓고 뜨거운 광장에 끌어내 우리 모두가 흥분한 나머지 현실인식을 그르친다면 쉬리는 죽을 것이다. 영화 ‘쉬리’는 한국영화도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의 상징이다.

세계시장에 내놓아도 자랑할 만한 수준으로 쉬리가 성장하지 못한다면, 즉 세계 시장을 개척하지 못한다면 ‘쉬리’는 아주 시골 동네잔치로 끝날 수도 있다. 우리는 분명 할 수 있다. 그러나 한국영화가 헤쳐나갈 길은 아직 멀고 험난하다.

강한섭(서울예술대학교수·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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