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한국전쟁관 사상논쟁 휘말린 최장집교수

  • 입력 1998년 11월 18일 20시 51분


《월간조선 11월호가 최장집(崔章集)대통령자문정책기획위원장의 한국전쟁관을 문제삼고 나옴에 따라 촉발된 사상논쟁은 법원이 문제의 월간조선에 대해 판매금지 가처분 결정을 내림으로써 본안소송을 기다리고 있다. 논쟁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당사자인 최위원장을 18일 그의 사무실에서 만났다》 ―사람들이 궁금해 하는 것은 왜 최위원장의 한국전쟁관이 논쟁거리가 됐느냐는 것입니다.

“솔직히 논쟁의 내용은 시대가 요구하는 것과 크게 괴리가 있습니다. 지금은 규범이나 가치에 있어서 개방화와 세계화가 요구되는 시점입니다.(논쟁의 촉발은) 좋게 보면 제 개인에 대한 공격일 수도 있지만 크게 보면 그 타깃이 개혁이나 변화에 대한 도전에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한국전쟁과 현대사(해방전후사)에 대한 인식의 지평을 넓히려고 시도했던 논문들인데 극단적인 보수주의자나 변화를 거부하는 사람들의 눈에는 이런 이슈를 논쟁의 대상으로 삼으면 자신들에게 유리하다고 여겼던 것은 아닐까, 생각합니다.”

―조선일보는 논쟁의 원인을, 위원장이 대통령자문 정책기획위원장을 맡고 있어서 위원장의 사상과 논리가 최고통치권자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점에서 찾고 있습니다. 사상검증을 받아야 하고 언론은 이를 감시하고 비판할 권리가 있다는 것이지요.

“사상검증이라는 용어 자체를 수용하기 어렵습니다. 그 말은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성립할 수 없습니다. 내면의 가치판단이나 신념체계 종교 사상 등이 민주주의 발전에 기초가 되었던 것은 그런 이유 때문입니다. 이런 데에 자유가 없으면 민주주의는 성립되지 않습니다. 조선일보가 우리 사회 전체를 대변할 수 있는 정당한 신념체계나 가치체계를 기준으로 특정인을 검증할 수 있는지는 의문입니다. 대통령 주변에 획일적 사고를 가진 사람만 있어서는 안된다고 봅니다.”

―조선일보의 주장은 자신들의 사상의 잣대로 최위원장을 보는 것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국가이념이자 보편적 가치인 자유민주주의라는 잣대로 보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일각에서는 ‘안보상업주의’라는 비판적 시각도 물론 있습니다만….

“저는 자유민주주의를 한번도 부정해 본 적이 없습니다. 자유민주주의는 사상의 자유, 종교의 자유, 언론의 자유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안보상업주의라는 말이 나온 것은 해방후 지금까지 공산주의하고 대치하는 상황에서 보수주의적 반공주의가 당연시되다보니까 그것이 지나쳐서 사회변화와 거꾸로 과거지향적인 냉전 반공주의를 자꾸 재생산하는 것입니다. 단기적으로는 상업적 이익을 볼 수 있을지 모르나 공적인 입장에서 볼 때는 과연 사회발전에 이바지할 수 있을 것인지 의문입니다.”

―법원은 일단 문제의 월간조선 기사가 최위원장의 명예를 훼손할 우려가 있다고 보고 관련 기사의 게재와 배포를 금지시켰습니다만….

“사법부의 용기있는 판단으로 보고 높이 평가합니다. 또 우리 사회의 전반적인 변화와 더불어 사법부도 보다 더 전향적인 역사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는 시대적 문제의식과 이성적인 역사판단을 이해한 결과입니다. 시대변화에 부응하는 판단이라고 봅니다.”

―이번 논쟁을 통해 많은 것을 느끼셨을 텐데요.

“물론 저의 시각이 전적으로 옳다는 것은 아닙니다. 보수주의적 시각도 있을 수 있습니다. 제가 지향했던 바는 이념적으로 이제는 좀더 열린 사회가 되고 사고도 열려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현대사에 대한 인식을 넓히는데 제일 어려운 문제의 하나가 그 당시 사실을 폭넓게 설명할 수 있는 정치적 용어가 부족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당시에는 사용하기 꺼렸던 여러가지 용어들을 서술어로 많이 끌어썼습니다. 민족해방전쟁 인민항쟁 부르주아 프롤레타리아 등이 그렇습니다. 이번에 문제가 됐던 현대사 해석 시비의 발단도 그런 용어사용이 너무 파격적이고 보기에 따라서는 북쪽을 찬양해서 쓴 말이 아니냐는 비판이 제기됐기 때문입니다.”

―한국전쟁만큼 민감한 문제가 없는데 위원장의 한국전쟁관을 한번 더 설명해 주시죠.

“한국전쟁의 발발원인을 보면 저는 북한의 김일성이 48년 이후 급속하게 전시동원체제를 형성했고 그 직접적인 결과가 김일성의 남침결정으로 나타난 것으로 봅니다. 이 결정은 스탈린의 동의에 의해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를 전쟁의 직접적인 원인이라고 봅니다. 이를 부정해본 적이 없습니다.

다만 저는 이 사태에만 문제를 두지 않고 한국전쟁을 보다 평화주의적이고 민중적인 시각에서 접근을 하려고 시도했습니다. 모든 책임을 김일성의 전쟁결정에만 초점을 맞춰서 본다면 김일성을 규탄하는 것으로 끝날 수 있지만 전쟁의 의미를 거기에만 한정지을 수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이념적으로 남한사회가 양극화됐고 또 남북이 양극화된 상황이 전쟁의 구조적인 원인을 이뤘다고 본 것입니다. 중간파의 존재가 중요한데 해방후부터 제1공화국이 건국되는 과정속에서 남한의 김구선생과 같은 폭넓은 중간파세력이 배제됐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를 비판한 것입니다.

나아가 한국전쟁 과정 속에서 초점을 둬서 설명한 것은 리더십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것이었습니다. 리더십이 잘못 결정을 했을 때 재난은 가혹한 것이고 고스란히 민중의 몫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많은 대중들이 정치적 지도부의 이념적 투쟁에 의해 희생됐고 얼마나 민중들이 이 전쟁에서 많이 희생됐느냐, 남북민중 모두 마찬가지라는 것이죠. 이런 서술방법이 조선일보에 의해서 북한민족만 생각했다고 제기된 것입니다.”

―한국전쟁에 대한 인식의 지평을 확대했다고 하는데 지평을 확대한다는 말이 실제로는 수정주의적 입장에 섰던 사람들의 해석을 수용했다는 뜻 아니겠습니까.

“저는 수정주의이론을 수용하지 않았습니다. 해방후 남한에 분단된 반공국가가 수립되는 과정에서 많은 민중들이 희생됐습니다. 남한이 좀더 민주주의적 정치의 틀을 발전시켰다면 희생자가 그렇게 많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민중의 희생과 평화주의적인 시각을 포함해서 나름대로 전통주의적 시각과 수정주의적 시각을 극복해 제삼의 시각을 만들어보자고 한 것입니다.

이 논쟁에서 가장 마음 아픈 것은 화해와 평화의 남북관계를 만들어갈 시기에 결과적으로는 이 문제를 둘러싼 이념적인 분열을 가져오는 하나의 쟁점을 제공했다는 점입니다.”

―위원장의 논문 중에는 소위 남한의 단독정부론자보다는 북한을 편드는 것으로 오해를 불러일으킬 소지가 있다고 봅니다.

“우선 정통성 문제를 얘기해 봅시다. 나는 북한의 정통성을 인정한 적도 없고 북한의 정통성을 인정하는 주장을 한 적이 없습니다. 그렇게 느끼는 부분이 있었다면 오해입니다. 북한과 남한의 제1공화국으로 제도화되는 정치체제 사이에 정통성을 비교하는 것은 비교의 대상조차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기본적으로 자유민주주의자입니다. 북한체제는 자유민주주의를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사회이기 때문에 인정할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이 말이 남한 정치체제가 아주 바람직한 형태로 제도화돼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이승만의 단정노선으로 시작해서 단독정부로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이승만 정부의 정통성을 인정합니다. 그 이유는 이승만정부가 자유민주주의를 제도화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정통성의 근본이 됩니다. 상해임시정부의 대통령이었고 해외의 대표적인 항일독립운동 지도자가 제1공화국 대통령이 됐다는 사실은 중요합니다. 하지만 나는 이승만정부에 대해서 강한 비판을 해 왔습니다. 그것은 단독정부 수립과정에서 많은 독립운동지도자들이 배제됐다는 것은 많은 이유 중 하나일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시각이 제1공화국의 정통성을 부인하는 세력들에 재료를 주고 있다는 점입니다. 또 북한이 끼여들어 논쟁의 본질을 흐리고 있고요. 그런 부분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 점은 분단의 아픈 상처입니다. 북한이 끼여들었을 때 저는 두차례 반박성명을 냈습니다. 저는 남북관계에 대해 ‘적대적 상호의존관계’라는 말을 씁니다. 그것은 북한의 강경 공산지도부와 남한의 반공보수세력이 서로 상호의존적으로 상대를 도와주고 있다는 논리입니다. 서로 상대가 독재정치를 할 수 있는 구실을 제공하는 것이죠. 우리가 탈냉전체제를 발전시켜 나가는 과정속에서 합리적 자유주의, 합리적인 보수그룹들이 다수가 되고 우리 사회에 다른 이념들을 압도할 수 있는 헤게모니를 가지고 강화시켜 나가야 됩니다.”

―‘역사적 결단’이나 ‘민족해방전쟁’같은 용어 선택에 대해 심한 저항감을 느낀 사람들이 많습니다.

“역사적 결단은 그 말만 떼서 보면 긍정적인 결단을 내렸다고 보일 수 있겠지만 실제 역사적 결단이라는 말을 썼을 때 김일성이 왜 오판을 하게 됐으며 무력통일을 시도했다는 것에 대해서 분명하게 명기하고 있기 때문에 문장을 전부 보면 오해의 소지가 없습니다. 민족해방전쟁이라는 용어도 서술적인 용어로 썼습니다. 일반독자를 염두해 두고 썼더라면 오해가 없도록 상세히 설명할 필요성이 있었다는 점을 느낍니다.”

―이런 소모적인 논쟁이 생산적인 논쟁으로 승화 발전할 수 있는 방법은 없겠습니까.

“제 논문을 둘러싼 일련의 논쟁과 소동은 냉전체제로부터 탈냉전체제로 이행해 가는 과정에서의 진통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이것은 변화를 거부하는 시각과 그룹의 저항이라고 보고 싶습니다. 이 정부가 해야 할 중요한 일이 국민통합인데 이런 이념적인 논쟁은 너무 소모적입니다. 전쟁이라는 경험을 중심으로 논쟁하면 감정적이 됩니다. 국민통합을 통해 새로운 21세기를 준비하기 위해서도 이런 것을 대승적으로 극복해 미래지향적으로 나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재호·이철희기자〉leejaeh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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