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마이너 리그(14)

  • 입력 1998년 11월 4일 19시 00분


교유 ⑦

여학생들과의 야유회 날은 날씨마저 좋았다. 우리는 기차로 40분 정도 떨어진 이웃 시의 유원지에서 휴일을 보냈다.

여학생들은 소희와 승주가 가깝다는 사실을 모르는 눈치였다. 승주를 둘러싼 여학생들의 은근한 각축은 이번에도 여전했다. 승주가 기타 반주에 맞춰 팝송을 부르자, 언제나 쓸데없는 질문을 함으로써 자신의 수준과 속마음을 노출시키고야 마는 봉단이 혹시 보컬 그룹을 할 마음이 없냐고 물었다. 승주는 주위에서 제의가 많이 들어온다고 대답했다. 어쩜! 여학생들은 〈진짜 진짜 좋아해〉의 임예진처럼 손뼉까지 치며 감탄했다. 왜 여자들이 한결같이 노래 잘하는 남자에게 그토록 넋을 잃는지 나는 사십이 된 지금까지도 알 수가 없다.

우리 학교에서도 교내 보컬 그룹이 공연을 한 적이 있었다. 악보를 구하기 힘든 시절이었으므로 그애들은 베이스 기타나 드럼의 연주를 외우기 위해서 별표 전축에 백판을 걸어놓고 20번 30번씩 되풀이 해야 했다. 무대 위에서도 어설프고 우스꽝스럽기 짝이 없었다. 빡빡머리에 검은 교복을 입고 다리를 흔들어대며 노래를 부르는 모습이라니.

그래도 여학생들은 열광했다. 왜 그럴까? 내가 시들하게 묻자 조국이 명쾌하게 대답했다. 일단 멋있으니까!

무슨 일이든 하면 되는 줄 아는 조국은 우리도 보컬 그룹을 하나 만들자고 제안했다. 악기 하나씩 배우고 승주를 가운데 세우면 되잖아. 승주가 보컬 제의를 받았다는 것은 그 일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내가 조국에게 현실을 일깨워주었다. 팝송을 불러야 할 텐데 영어 자신있어? ‘소파’를 언제나 ‘쇼파’라고 발음하는 조국은, 팝숑? 왜 못해? 라며 곧바로 한 소절을 불렀다. 옷 벗구 짜리에 누우워! 톰 존스의 〈프라우드 메리〉 첫 소절인 렙터 굿 자압 인 더 시티(left a good job in the city)를 그렇게 부르는 거였다.

그 노래는 신청 엽서를 읽는 라디오 디제이를 피곤하게 만드는 곡이기도 했다. 이 노래를 부른 가수는 톰 존슨이 아니라 톰 존스입니다. 그리고 다음부터는 프라이드 메리라고 쓰지 말고 프라우드 메리라고 써서 보내주세요. 영화 많이 보는 애들이 아랑 드롱을 절대 명배우로 꼽지 않듯이 팝송깨나 듣는 애들은 톰 존스를 좋아하지 않았다. 롤링 스톤스나 박스탑스, 레드 제플린 등을 들먹이며 티를 냈다. 고등학생 때까지만 해도 스스로를 잘났다고 생각하기는 그리 어렵지 않은 법이다.

승주가 여학생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것을 소희는 무표정하게 지켜보았다. 뭔가 골똘히 생각하는 것 같기도 했지만 그 자리가 지루해 못 견디겠다는 표정으로도 보였다. 여러 번 머리핀을 빼서 다시 꽂기도 했다. 한 번은 머리핀을 떨어뜨렸는데 두환이 집어주자 빙긋 웃었다.

소희가 승주에게 보낸 편지 중에는 이런 것도 있었다.

‘단 한 사람을 영원히 사랑한다는 일이 가능할까. 나는 나를 위해 모든 것을 버려야만 진짜 사랑이라고 믿을 수 있을 것 같아. 그리고 그런 사람에게 나의 모든 것을 바치고 싶어.’

<글:은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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