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하며 생각하며]박찬숙/방송인과 청취자 사이

  • 입력 1998년 10월 29일 19시 04분


“그렇게 억울하면, 그렇게 군대가는게 좋으면 여자들도 군대가면 될 거 아녜요.”

“그렇게 말씀하시면 어떡해요. 그러면 남자도 애기 낳으면 될 거 아녜요, 이런 말을 여자들도 할 수 있지요.”

지난주 ‘라디오 정보센터 박찬숙입니다’열린마당 코너에 참여한 한 남성의 뜨거운 직격탄에 내가 답한 말이었다. 주제에 따라 찬반이 명확히 갈릴 때는 활화산처럼 느껴지는 그 맛이 묘미인데 진행자인 나로서는 중심을 잘 잡지 않으면 즉각 심판대에 오르는 위험이 있다. 그러니까 이 말을 뱉은 순간 나는 각오가 되어 있었다고나 할까? 그러나 그 항의의 정도나 질이 상상을 뛰어 넘었다. 곧이어 참여한 다음 청취자는 나를 꾸짖었다.

“박선생님, 너무 심한 것 아니에요?”

“아유, 비유가 그렇다는 거죠. 한번 재미있게 말해 본 거였어요.”

2시에 방송은 끝났다. 사무실안의 모든 전화벨이 동시에 울려댔다.

“네, 네, 퇴근했습니다.”

“네, 죄송합니다. 좀 지나쳤죠.”

애꿎은 PD들이 곤욕을 치르고 국장실 본부장실 모든 전화는 남성들의 항의전화와 여성들의 환호의 전화로 시끄러웠다. 그래도 내가 받은 한 전화의 청취자는 점잖았다.

“정말 대한민국 남자들 충격받았습니다. 코미디프로도 아니고 시사프로에서 박선생님이 그런 말씀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애청자로서 충고합니다. 내일 사과방송하시라고요.”

“야 이 ×아, 너는 국가관도 없어, 북한군이 쳐들어오면 만세부를 인간아냐! 남자는 위대한거야. 군대 3년에 몇년치를 더 보태 혜택 줘야 해.”

“너무 잘했어요. 군대 갔다왔다고 회사 채용시험부터 몇점 얹어받다니. 여자들이 애기낳고 기르느라고 회사 못다니고 불이익이 많은데…. 박찬숙씨 잘했어요. 기죽지 말고 씩씩하게 나가세요.”

군경력자에 대한 채용 급여 승진에 3중으로 가산점을 주자는 움직임에 대한 토론회가 9월 중순 국회에서 있었다. 분단이란 특수상황에서 인생의 황금기를 군복무로 보내야 하는 청년들에게 일정한 보상이 있어야 한다는데는 누구나 공감할 것이다. 그러나 채용시험에 경력으로 가산점을 주면, 여성이나 장애인들에게는 원천적으로 불이익이 되니 채용 이후 호봉을 높여줌으로써 그만큼의 세월을 보상하자는 것이었다. 마침 규제개혁위원회에서도 경력인정조항을 유보하기로 했다는 뉴스가 있어 이날의 열린 마당에 올린 거였다.

여론은 남과 여로 갈렸다. 여성은 병역의무에서 제외됐을뿐, 가고싶은 것 막지는 않으니 군경력 우대가 부러우면 여성도 군에 가면 채용시험때 가산점을 받을수 있을 거 아니냐는 일면 옳은 지적에 나는 청취자에게 무엄하게도 남성으로서는 불가능한 임신 출산이라는 방패를 썼으니 화근은 화근이었다. 그것이 방송이었으므로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만큼 그것은 농담이었다’는 나의 핑계도 통할 리가 없었다.

다음날 나는 마이크 앞에서 이렇게 말했다.

“어제의 방송은 하여튼 제가 잘못했습니다. 마리 생 로랑이라는 시인의 ‘잊혀진 여자’라는 시가 생각납니다. 마지막 구절은 이렇습니다. ‘죽은 여자보다 더 쓸쓸한 것은 잊혀진 여자외다.’ 많이 듣고 사랑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박찬숙(앵커우먼)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