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문정인/클린턴 性추문과 세계위기론

  • 입력 1998년 9월 21일 19시 19분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의 섹스 스캔들과 관련한 연방대배심 증언 비디오테이프가 21일 밤(한국시간) 인터넷과 TV를 통해 공개됨으로써 또 한차례 세계가 시끄럽다.

11일 인터넷에 공개된 포르노를 방불케 하는 4백54쪽의 방대한 케네스 스타 특별검사의 보고서가 세계 최강국 대통령의‘부적절한 성관계’를 적나라하게 드러냈다면 이번 비디오테이프는 법정에 선 대통령의 ‘후회와 분노’를 더욱 생생하게 보여줬다.

그동안 야당인 공화당과 스타검사측은 르윈스키와의 섹스스캔들은 물론이거니와 위증 직권남용 사법절차방해 등을 들어 클린턴대통령의 탄핵을 주장해왔었다. 이번 비디오테이프 공개로 인해 클린턴대통령에 대한 탄핵 여론이 더욱 거세질 것으로 언론들은 예측하고 있다.

▼ 탄핵-사임 쉽지 않을듯 ▼

어차피 최종 결과는 미 의회의 법률 검토를 거쳐 내년 여름에나 알 수 있겠지만 클린턴탄핵론은 국제사회에 엄청난 파장을 미치고 있다. 즉 도덕적 실추에 따른 미 지도력의 부재 현상은 세계에 위기와 재앙을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추론은 다분히 과장된 것으로 보인다.

무엇보다 탄핵은 다소 성급한 예측이다. 우선 현직 미 대통령의 탄핵은 역사상 유례가 없다. 1868년 앤드루 존슨 17대 대통령에 대한 탄핵 소추도 1표차로 부결된 바 있고 워터게이트사건으로 탄핵소추 위기에 처했던 닉슨은 사임으로 마무리를 했다. 이렇듯 현직 대통령의 탄핵은 쉬운 일이 아니다.

아무리 위증과 직권남용 등 절차법상의 하자로 얽어맨다 해도 이번 사건은 본질적으로 사생활에 속하는 것으로 탄핵이나 강제 사임으로 귀결되지는 않을 것이다. 더구나 11월 중간선거를 목전에 둔 민주 공화 양당의 정치적 손익 계산과 60%를 상회하는 클린턴의 정책수행 능력에 대한 60%를 상회하는 높은 지지도를 감안할 때 이같은 조치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탄핵문제는 차치하더라도 이번 성추문과 관련, 세계 언론들은 적어도 몇가지 큰 오류를 범하고 있다. 첫번째는 환원주의의 오류다. 스타보고서가 나오자마자 세계 언론들은 ‘세계 경제에 악재’ ‘미국 대외정책 표류위기’ ‘혼미 속의 미국 국정’ 등의 헤드라인으로 ‘클린턴 임팩트’를 선정적으로 보도했다. 이는 잘못된 시각이다.

미국 대통령의 위기를 미국과 세계의 위기로 동일시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클린턴의 탄핵이나 사임이 미국의 패권적 지도력에 종말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승계 1순위인 앨 고어 부통령은 클린턴 못지않게 국정을 훌륭하게 이끌어나갈 수 있다. 때문에 지도력을 잃은 미국 대통령은 미국뿐만 아니라 세계의 재앙이라는 성급한 결론은 현실인식의 한계를 노정하는 것이다.

두번째 오류는 미국의 국정운영체계에 대한 무지다. 대부분의 언론들은 클린턴이 현 정국을 무사히 넘긴다 해도 이미 도덕성과 설득력을 상실했기 때문에 ‘레임덕’현상에서 벗어날 수 없고 미국정국은 혼미를 면치 못할 것이라고 예측하고 있다. 물론 지도자에게 도덕성은 중요하다. 그러나 그것이 국정운영에 절대적인 요소는 될 수 없다.

미 대통령의 권위와 권능은 그의 도덕성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헌법에 규정된 제도에서 나온다. 대통령의 영향력이 다소 감소되더라도 국가이익, 제도적 장치, 그리고 정책관성에 의해 국정운영은 순조롭게 진행될 수 있다. 특히 국가 위기가 발생할 경우 클린턴의 영향력은 쉽게 되살아날 것이다.

마지막으로 도구적 도덕주의의 함정을 들 수 있다. 미국 언론과 공화당 의원들은 이번 사건을 청교도적 도덕주의의 승리로 규정하며 미국을 도덕적 우월 국가로 부각시키고 있다. 이는 기만이다. 도덕성을 빙자한 ‘정치적 카니발리즘’이 이번 사건의 요체라 할 때 어쩌면 이는 중세의 종교재판보다 더 잔인한 성적 매카시즘으로 미국사회의 위선적인 이원주의를 보여주는 것이다. 클린턴은 이같은 도구적 도덕주의의 함정에 빠진 것이다.

▼ 언론 과장보도 경계를 ▼

사실 이번 성추문 사건은 안방 드라마 소재로 끝났어야 했다. 이런 사건을 두고 미국의 위기, 세계의 위기로 과대 포장하는 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이다.

끝으로 지적하고 싶은 것은 이번 성추문 사건에 한국정부나 여론이 부화뇌동해서는 안된다는 점이다. 클린턴 행정부가 어렵고 민주당 열세가 예상된다 해서 대미접근의 방향을 의회와 공화당쪽으로 선회한다는 발상은 극히 기회주의적 행태로 득보다 실이 많게 된다. 우리는 사태를 관조하면서 평소대로 대미정책을 전개해 나가면 될 것이다.

문정인(연세대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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