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구름모자 벗기 게임 (56)

  • 입력 1998년 9월 21일 19시 13분


제2장 달의 잠행 32

나는 말없이 소주만 마셨다. 그리고 무엇이 나를 불행하게 만들고 있는 지 생각했다. 왜 이렇게 사는 지. 왜 생이 이렇게 어긋나 버렸는지…. 남편과 나에게 일어난 일을 까맣게 망각해버리고 다시 사랑하며 살아갈 수는 없는지. 아니 사랑 따윈 없이 그냥 늙은 여자처럼 선량하고 평화롭게 살 수는 없는지. 사랑하고 싶어하는 이 펄펄 끓는 마음을 한 순간에 다 털어버릴 수는 없는지. 무엇이 나를 이렇게 뒤흔드는지….

꼭 용경과 같은 모습으로 소주잔을 들이키고 어묵을 찍어 올리는 데 언제 왔는지 규가 내 앞에 서 있었다. 그는 다른 때와는 달리 좀 우울해 보이고 눈빛이 불안정했다. 그 숲에서처럼, 나를 만나기 위해 달려와서 멈춘 외로운 마라톤 선수같이 가난한 눈. 숲에서 마주친 후로 3일 만이었다. 그와 갈라져 박쥐나무 숲길로 들어간 나는 한참동안 꼼짝도 하지 못하고 서 있었다. 발길을 뗄 수가 없었다. 나는 조금 울었고 우는 자신을 나무랐다. 점점 감상적인 여자가 되어가고 있다고.

―갔다와요. 수는 내가 데리고 있을께.

용경이 혀가 감기는 소리로 느릿느릿 재촉하는데도 나는 물끄러미 그를 올려다 보기만 했다. 이 남자는 왜 갑자기 또 이런 얼굴로 내 앞에 서 있는 것일까?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어서, 금세라도 두 손을 다 들 것 같은 얼굴로 나를 찾아 왔을까.

나는 탁자를 잡고 일어섰다. 그 바람에 어묵국 그릇이 미끄러져 잔디밭에 뒹굴고 국물이 옷에 튀었다. 늘 그 모양이었다. 무엇인가가 쏟아지고 깨어지고…. 규가 나를 부축했다. 차에 타자 나는 고집스럽게 말했다.

―수몰 마을에 가고 싶어요. 거기 데려다 주세요.

―거긴 사람들 눈에 잘 띄어. 어디에 차를 세워도 길에서 보인다구.

―당신 혼자 가 있는 줄 알겠지. 날 그곳에 데려다 줘.

―거기서 뭘하려는 거요?

―모르겠어요. 그냥 가고 싶어. 처음부터 가고 싶었어. 하지만 혼자서는 그 텅빈 마을에 가기가 무서웠어.

―지금 많이 취했어.

―상관 없어요.

―그곳은 상한 생선의 배를 갈라놓은 것처럼 그저 퀴퀴하고 적막하고 사라져간 사람들의 흔적만 기괴하게 묻어 있는 곳일 뿐이야.

―가요.

마을의 마당에 차를 세우고 걷는데 규가 손짓을 했다. 흰색 페인트 칠이 더러 벗겨진 담벽에 연필로 작은 글씨가 쓰여 있었다.

―우리집 우리집 행복한 우리집.

안채와 사랑채와 별채와 광들과 축사들을 가진 무척 큰집이었다. 누가 떼내어 갔는지 방의 문짝들이 하나도 남아있지 않았다. 활짝 열려 있는 광 안엔 쇠스랑 호미, 가래 같은 농기구들이 녹슬어 넘어져 있고 안방엔 한쪽 귀퉁이가 깨어진 낡은 자개장롱이 세워져 있고 마루 아래엔 사람이 살기라도 하는 듯 흰 고무신과 낡은 운동화들이 먼지를 뒤집어 쓴 채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책이 흩어져 있는 방, 장작과 마른 나뭇잎이 뒹구는 검게 그을린 부엌, 커다란 장독들이 남겨져 있는 장독대. 집 뒤엔 내던져진 바구니들과 솥과 단지들. 그가 힘겹다는 듯 긴 숨을 내쉬며 나의 손을 꽉 잡았다. 그의 손바닥이 내 손바닥에 닿자 그 단순한 접촉에도 가슴이 뭉클해지며 조용히 피가 떨렸다.

<글:전경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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