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김용택/「손가락 절단사건」을 보고

  • 입력 1998년 9월 14일 19시 03분


아, 아버지가 이럴 수도 있구나. 사람이 이렇게 될 수도 있구나 하는 부끄러움과 수치심으로 고개를 들고 어디를 쳐다볼 수가 없다. 한 초등학교 어린이의 잘려나간 손가락 하나가 우리에게 준 충격과 분노 그리고 허탈감과 참담한 상실감은 너무도 크다.

모든 사람이 이런 허탈감과 수치심으로 치를 떠는 것은 우리들이 그동안 살아온 것이 말짱 헛것이 되어버린 것 같기 때문이리라. 무참하게 잘라져 시멘트 틈에 싸늘하게 버려진 것이 결코 손가락 하나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무엇인가 우린 더 큰 것을 우리 몸에서 우리 마음에서 자르면서 살아왔는지 모른다. 인생이 무엇이며 잘 산다는 것이 도대체 어떻게 사는 것이며 행복은 또 무엇인가. 참말로 이렇게 살아도 되는 것인가. 우리는 지금 우리의 모든 삶을 다시 점검할 때가 되었다. 살면서 이렇게 입안이 쓰고 밥맛이 싹 가시는 일이 또 있었던가.

그러면서 나는 슬그머니 오늘의 탁한 정치 현실이 떠오르며 분노로 이어진다. 도대체 어떤 것이 옳고 그른 것인지 온통 세상을 뒤죽박죽으로 만들어놓고도 무사한 곳이 우리들의 정치판이지 않은가. 우리 사회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정치가 사회를 가장 앞장서서 더럽혔다는 것을 아무도 부인하지 못하리라.

이제 참으로 우리는 사람다운 삶을 사느냐 짐승으로 사느냐의 중요한 시점에 다다른 것 같다. 더 많은 것을 잃고 더 허둥대기전에 정신을 차릴 때가 온 것이다. 인간을 잃어버렸는데 박세리가 열번을 더 일등을 하고 박찬호가 스무번을 더 이긴들 그것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나는 아들의 손가락을 자른 그 아비를 눈곱만큼도 두둔할 마음은 없다. 또 그 아비의 잘못이 우리 정치의 잘못이라고 전적으로 핑계대지도 않는다. 우리들 그 누구도 잘려나간 한 아이의 손가락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생각이며, 우리들의 현실에서 우리들의 가치관을 가장 앞장서서 파괴해버린 정치의 책임이 크다는 생각이다.

나라의 기강을 바로 세워야한다. 세상의 가치를 바로 세워야한다. 정치를 바로 세워야한다. 날이면 날마다 썩은 냄새를 풍기는 정치를 이대로 두고 우리에게 무슨 희망을 가지란 말인가. 그래야 우리들의 삶이 바로 선다. 우린 지금 돈도 잃고 마음도 잃어버렸다. 그래서 지금 우리들의 마음이 이리 허전하고 참담한 것이다.

발등을 찍고 싶은 심정이며 땅을 치고 싶다. 잘려나가 버려진 아이의 손가락을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지고 목이 멘다. 잘려나가고 버려진 것이 손가락만은 아닌 우리들의 암담한 세상, 그러나 산천엔 가을빛이다. 만산이 그렇고 산골 논의 노란 벼들이 그렇다. 어김없이 가을이 온 것이다.

아프고 괴롭고 고통스러움 속에서도 우리들은 한 계절의 문턱을 넘고 있다. 늦더위는 우리들을 헉헉거리게 하지만, 그런만큼 따가운 햇살은 이 세상 모든 나무와 풀과 곡식들에게 깊이 닿아 그들을 꽃피우고 열매맺게 하고 고개 숙이게 하여 생각으로 익게한다.

아이들이 운동장에서 신나게 놀고 있다. 얼마 전에 베어버린 운동장가 풀밭에 풀들이 파랗게 새로 돋아나고 있다. 그 위에 잠자리가 난다. 잘려나간 아이의 마음에도 우리들의 아프고 쓰린 허전한 마음에도 저렇게 새 풀잎이 돋아난다면 이 가을은 진정 우리의 가을이리라.

김용택<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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