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日王과 天皇

  • 입력 1998년 9월 11일 19시 41분


정부가 일왕(日王)을 천황(天皇)으로 부르기로 결정했다. 왜 이 시기에 갑자기 호칭을 바꾸는지 우선 당혹스럽다. 식민통치라는 역사의 상흔을 안고 사는 국민으로서 착잡하기 짝이 없다. 일본이 아직도 과거사를 깨끗이 청산하지 않은 채 잊을 만하면 망언을 해대는 판에 천황을 공식호칭으로 쓴다는 것에 저항감도 생긴다. 민족적 자존심에 상처를 받는 것 같은 느낌도 지우기 어렵다.

정부는 그런 미묘한 문제를 결정하려면 국민의 의견을 미리, 그리고 충분히 들었어야 한다. 그런 절차도 거치지 않고 일방적으로 호칭변경을 발표한 것은 잘한 일이라고 보기 어렵다. 더구나 정부가 이렇게 했으니 국민도 따라오라는 식이라면 큰 잘못이다. 이 문제는 우리 사회에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킬 것이 분명하다. 정부가 논쟁의 추이를 지켜본 뒤에 호칭을 바꿨더라면 일반의 당혹감과 착잡함은 줄었을 것이다.

천황 호칭이 이번에 처음 나온 것은 아니다. 정부도 언론도 천황으로 부르다가 89년부터 언론은 일왕, 정부는 일황(日皇)이라고 표기했다. 어찌 보면 ‘고뇌의 결과’였다고 할 만했다. 그러나 같은 한자를 쓰고 비슷한 일제침략을 받은 중국이나 대만, 그리고 영어권 국가들과는 다른 ‘특별한 호칭’을 우리만 쓰게 된 것 또한 사실이다. 다른 나라도 아닌 일본의 상징을 우리가 외국과 똑같이 불러야 할 것은 아니지만 ‘우리식 호칭’을 언제까지 고집할 것이냐는 문제는 있었다. 특히 일본인들은 깊은 위화감을 느껴왔다.

국민감정과 세계조류 사이에서 정부도 고민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럼에도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의 일본방문을 앞두고 호칭을 정리한 것은 역사의 앙금 가운데 우리가 걷어낼 것은 먼저 걷어내자는 취지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한일관계 재정립을 향한 본격적인 정면돌파의 의미를 갖는다. 그렇게 해서 일본이 역사청산에 더욱 진지하게 임하게 하겠다는 고려도 있었음직하다. 군대위안부 보상금을 정부예산에서 지급해 일본 민간기금의 접근을 차단한 것과도 비슷하다.

이제 일본이 상응한 조치를 취해야 할 차례다. 일본은 정부지도자가 사죄하면 정치인은 이를 망언으로 뒤집는 악순환을 단절하고 한국인이 수긍할 만큼 진심어린 반성의 자세를 보여야 옳다. 최근에 시작된 역사공동연구에 더욱 성의있게 임해야 할 것임은 말할 나위도 없다. 그래야 우리 국민도 전후(戰後)일본의 변화를 있는 그대로 직시하게 될 것이다. 한일 양국은 거의 모든 분야에서 협력과 교류를 넓혀가고 있고 또 그래야 할 처지다. 2002년에는 월드컵을 공동주최하게 돼 있다. 우리도 21세기를 준비하는 마음으로 한일관계를 새롭게 보아야 할 때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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