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스탠더드시대 27]우리나라 구난체계 문제점

  • 입력 1998년 8월 25일 19시 26분


계곡물이 불어 넘치도록 들리지 않는 자동우량경보장치. 집에 물이 들어차 신고를 해도 서로 떠넘기기 바쁜 행정기관. 냄비도 물도 없는 수재민들에게 달랑 지급되는 라면….

올여름 집중호우끝에 적나라하게 드러난 우리나라 구호체계의 현주소다.

지리산과 수도권 지역의 수해 원인과 복구작업의 문제점을 조사했던 국립방재연구소 조원철(趙元喆·연세대 교수)소장은 “재해신고 접수부터 조난자 구조, 응급 복구작업까지 어느 것 하나 제 역할을 해낸 부분이 없었다”고 한탄했다. 다음은 재난구조 전문가들이 지적하는 우리나라 구난(救難)체계의 문제점 다섯가지.

▼실상황 관리(리얼타임 매니지먼트) 체계가 없다〓행정자치부가 펴낸 ‘재해대책편람’에 따르면 재해발생시 전 행정부처가 동원돼 구성되는 중앙재해대책본부는 모든 인력과 장비를 동원해 빠른 시일 안에 주민을 대피시키고 피해를 복구할 책임과 권한이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피해 집계와 보고 기능만 할 뿐이다.

6일 새벽 하천 범람으로 물바다가 된 경기 동두천 파주 남양주시에는 주민 대피령이 뒤늦게 내려지거나 아예 내려지지도 않았다. 또 ‘침수된 파주시에 6대의 중장비를 지원하라’는 지시를 받은 안양 부천 평택시는 “우리도 필요할지 모른다”며 이를 거절했다.

이재민 10명중 1명이 피부병을 앓을 지경인데도 방역대책을 내놓기는 커녕 스스로 찾아온 민간 의료지원팀도 ‘관내에서 지원을 요청한 곳이 없다’며 돌려보냈다.

미국의 경우 재해 발생지역의 소방서장이 복구의 총 책임자가 돼 일사불란하게 움직인다. 서장의 명령에 불복할 사람은 없다. 지난해 8월 괌 대한항공 추락사고때 위험을 무릅쓰고 사고 현장으로 달려가 일본인 소녀를 구했던 구티에레스 주지사는 ‘서장의 통제지시를 무시하고 현장에 접근했다’는 이유로 벌금을 물어야 했다.

▼제구실 못하는 긴급 방재장치들〓96명의 인명을 앗아간 지리산 참사. 계곡물이 불어나기 전 대원사 계곡의 몇몇 자동경보장치는 울리지도 않았다. 게다가 계곡 바로 옆이나 울창한 숲속에 설치돼 있는 경보장치가 큰 소리를 내도 물소리에 묻혀버리고 만다.

서울도 장대비가 쏟아지자 곳곳에 설치돼있는 자동펌프가 무색하게도 30여곳의 지하차도부터 잠겼다. 서울시는 장마철이 오기 전에 모든 수방 장비를 점검했다고 밝혔으나 자동펌프는 작동하지 않았다.

▼대피령 발령 지역에 대한 대책이 없다〓6일 서울 노원구 주민들에게는 긴급 대피령이 내려졌다. 그러나 주민들은 ‘좀도둑이 들까봐 나가지 못하겠다’며 꼼짝도 하지 않다가 피해를 키웠다. 행정기관은 주민들이 안심하고 명령에 따를 수 있도록 대피령을 내리는 즉시 경찰력을 동원해 그 지역을 지켰어야 했다.

▼국가 지원금 지급이 너무 늦다〓정부는 수해민을 위한 위로금과 대출금 지원사업을 대대적으로 발표했지만 일선 동사무소나 시청을 찾은 이재민들은 ‘모른다’ ‘기다리라’는 대답만 들었다.

이재민들이 하루빨리 재해의 악몽을 털고 일어날 수 있도록 국가 비상 예비비에서 지원한뒤 사후 정산해야 한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매뉴얼이 없다〓재난 유형에 따라 복구활동의 내용도 달라진다. 그러나 교량사고 건물붕괴사고 홍수 지진 등 재난 유형별 대처 매뉴얼이 전혀 없다.

〈이진영기자〉eco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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