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수관을 찾아서⑦]조선인이자 일본인 「두가슴」비극

  • 입력 1998년 6월 28일 20시 46분


주미 대사를 거쳐 2차 대전중 두 번이나 일본의 외무대신을 지낸 도고 시게노리(東鄕武德), 일본 독일 이탈리아의 3국동맹에 반대했고 전쟁 말기에는 군부에 대항하여 화평공작을 전개했던 사람이다. 그런 그가 바로 심수관가와 함께 이웃에서 그릇을 굽던 도공의 후손이었다니.

그는 1882년 박무덕이라는 이름으로 나에시로가와에서 태어난다. 그는 전후 도쿄재판에서 A급 전범으로 기소되어 20년 형을 받고 복역 중 옥사했다. 한달여 전 그의 생가터에 기념관이 개관했다. 심수관가에서는 걸어서 몇 분 거리다. 아직 조경 공사가 채 마무리되지 않은 뜰에 그의 동상이 햇빛을 맞고 있었다.

같은 배를 타고 일본으로 끌려갔던 어느 도공의 후손은 귀화하여 일본 고위 관리가 되었다가 옥사하고, 어느 후손은 4백년을 묵묵히 도공의 길을 버리지 않고 살아가고 있었다니.

나에시로가와의 도공들, 그들의 삶을 바라보자면 하나의 의문이 남는다. 그들은 언제나 일본 역사의 한가운데 서는 것을 피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단군 성조를 모시는 옥산궁 앞은 지금 차밭이다. 잘 손질된 차 나무들이 짙푸르게 이슬을 맞고 있었다. 그러나 여기에도 도공들의 역사는 묻혀 있다. 바로 이 자리는 1869년 명치 정부가 유신에 반대하던 막부 세력을 타도하고 국내를 통일한 내전, 무진(戊辰)전쟁에 참전했던 마을 도공들의 조련장이었다.

4만5천으로 무장한 사쓰마 군대를 주축으로 한 관군은 막부군 1만5천을 박살내며 북진, 일거에 도쿄 성을 열고 무혈입성한다. 우에노에서의 일전을 거친 후, 마지막까지 저항하던 막부군을 추격하여 본토의 최북단 하코다테에서 척결한 전쟁이다. 이 전쟁에 도공과 그 후예 1백7명이 나섰었다.

살아서 돌아온 도공들은 그러나 참전의 대가로 유형무형의 그 어떤 전리품도 받으려 하지 않았다. 도공들은 돌아왔고, 묵묵히 물레를 돌리는 일로 돌아갔다.

그러나 일본 국내 정치의 요동은 1877년 ‘서남전쟁’에 휘말려든다. 가고시마 출신 하급무사로 후에 유신의 핵이 되고, 육군총사에까지 올랐던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가 중앙정부에 맞선 전쟁이었다. 미야마의 도공들도 이 전쟁에 참가하고, 전쟁은 사이고의 자결과 함께 끝났다.

심수관씨의 도원에서 멀지 않은, 미야마를 관통하고 있는 길옆 산록에 전몰자들을 위한 묘지가 있다. 그곳 초혼총 비석 하나가 가슴을 움켜잡는다. 중앙정부에 반기를 들었던 바로 그 서남전쟁에 참전했던 전사자들의 묘이다. 비석 뒷면에 아직도 또렷이 음각되어 있는, 검게 이끼가 낀 9명의 이름을 손가락으로 더듬어 가며 읽는다.

박준석 이선백 박장익 진원겸… 세 사람의 이름은 누군가가 돌을 파내어 지워버렸다.

무엇이 그 이름들을 지워버리게 했을까. 역사의 유전(流轉)에 눅눅해 지는 가슴으로 해지는 숲을 바라본다. 무덤 옆에 보라빛으로 피어난 수국이 흐드러져… 무심히 꿈결같다.

일본의 문호 시바 료타로(司馬遼太郎)는 이들을 두고 이런 말을 남겼다.

“당신들 조선 도공의 후예들은 두 가지의 가슴, 두 가지의 심장을 가지고 있군요. 하나는 선진 조선의 도예를 일본에 전했다는 자부심으로 가득찬 조선인의 가슴입니다. 그리고 하나는 이 타국 땅에서 살아남기 위해 모든 것을 일본에 바쳐야 했던 일본인으로서의 가슴입니다.”

심수관가 14대의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시점이 필요하다. 두 가지의 심장으로 뛰고 있는 고동소리를 들어야 한다. 조선인으로서 고향을 잊은 적이 없으면서 그리고 일본인으로 살아남았던 그 생의 비극성이 보여주는 깊이를 작품 속에서 읽어야 한다. 시대와 역사의 흔들림에 몸을 맡겼다가, 묵묵히 돌아와 물레를 돌린… 그 4백년의 도정을.

한수산(작가·세종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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