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김종심/한글의 운명

  • 입력 1998년 6월 26일 20시 37분


올해 29세의 컴퓨터 벤처기업 대표가 6월18일 한 일간지에 전면광고를 냈다. 미국 마이크로소프트(MS)사가 한글과 컴퓨터(한컴)사에 1천만∼2천만달러를 투자하는 대신 한컴이 주력사업인 아래아한글 워드프로세서를 포기하기로 했다고 발표한지 사흘 뒤의 일이다.

‘회사가 어렵다고 아래아한글을 마이크로소프트에 팔면 나라가 어렵다고 독도를 일본에 팔까?’라는 도발적 부제를 붙인 이 ‘대국민 호소문’의 마지막 문구가 가슴을 때렸다.

광고를 내는 까닭이 첫째, 한글을 쓰는 아버지를 두었고 둘째, 자기 또한 한글을 배웠고 셋째, 자기 딸에게 한글을 가르쳐야 하는 죄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1998년을 ‘마이크로소프트 식민지 원년’이라고 규정한 그로서는 한국인으로서 한글을 지키지 못하는 안타까운 심정을 ‘죄’로 표현했을 것이다.

세계 워드프로세서시장의 94%를 지배하고 있는 MS워드에 맞서 우리나라 워드프로세서 시장을 당당히 지켜온 아래아한글이 그 MS의 패권 앞에 무릎을 꿇게 된 것은 우리의 문화적 자존심이 한꺼번에 무너지는 듯한 충격을 준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하나의 소프트웨어 아래아한글이 사라진다고 해서 세계에서 가장 과학적인 문자인 우리 한글이 금방 자취를 감추게 되는 것은 아니다.

나라와 민족이 소멸하는 것도 아니다. 더구나 아래아한글의 포기가 독도의 포기라는 비유는 지나친 비약일 수 있다.

그렇지만 아래아한글의 몰락은 우리의 문자생활을 심각하게 제약하는 것도 사실이다. MS워드로는 발음대로 써내는 우리 글의 무궁무진한 표현방식과 조어능력을 충분히 구현할 수 없다. 우리말 사전을 만들 수도 없고 까다로운 외래어의 표기도 어렵다. 고대 국어에 대한 논문도 쓸 수 없다. 언어와 문자도 시대와 함께 진화한다지만 MS워드의 한글표기 제약은 우리 말과 글의 진화를 가로막을 수 있다. 아이들에게 아름답고 풍부한 우리말 어휘를 가르칠 수도 없다.

아래아한글 몰락으로 우리 글은 불구화(不具化)하고 우리의 생각도 불구를 면치 못할 수 있다. 그런 뜻이라면 아래아한글살리기 운동을 세계화에 역행하는 국수주의의 발로로 보아서는 안된다. 외자유치를 가로막는 반국가적 행위로 볼 일도 아니다.

정보는 세계가 공유할 수 있지만 하나의 언어를 만국 공용어로 쓸 수는 없다. 세계 각 민족의 고유한 말과 글을 가꾸고 살리는 것이 다양한 문화가 세계시장에서 동등한 자격으로 경쟁하는 진정한 세계화의 첫걸음일 것이다.

다만 아래아한글이 정보의 교류와 공유에 방해가 된다면 문제는 달라진다.

실제로 아래아한글은 다른 운영체계와 많은 마찰을 일으킨다. 국어의 현실을 충실히 반영하는 아래아한글이 국제적 호환성의 개발을 등한시했기 때문이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아래아한글은 이대로 둬도 세계적인 통합시스템에 적응하지 못하고 도태될 운명이라는 전문가들의 진단이다. 아래아한글살리기 운동에도 불구하고 아래아한글이 살아날 가능성이 없어 보인다는 비관적 전망인 것이다.

그렇다면 선택은 분명하다. 우선 한컴이 MS와의 약속을 깨고 아래아한글사업을 계속하는 것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그럴 가망은 없다. 사업도 사업이지만 한컴의 기술이 한계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둘째 방법은 MS에 아래아한글의 호환성을 높이고 아래아한글의 특성을 반영한 프로그램을 개발하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이 역시 거의 무망하다. 세계 워드프로세서시장 점유율이 1.6%에 불과한 우리나라 워드프로세서시장을 위해 MS가 막대한 개발비를 투입할 리 없다.

남은 선택은 하나, ‘뉴아래아한글’이 됐든 뭐가 됐든 워드프로세서를 뛰어넘어 다양한 프로그램에서 한글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새 프로그램을 우리 손으로 개발하는 길이다.

워드프로세서 아래아한글이 아니라 우리의 글 한글을 어떻게든 지켜야 하기 때문이다. 이 일을 금모으기운동식 민간운동에 맡기고 정부는 시장원리나 되뇌고 있어서는 안된다. 정부가 나서야 할 일이다. 시장성 때문에 한글 소프트웨어 개발에 적극적일 수 없는 민간에 한글의 운명을 맡겨서는 안된다.

말과 글을 지키는 일은 곧 나라를 지키는 일이다. 인터넷의 언어는 이미 영어 하나로 통일돼 있다. 기술 없이는 모국어도 지키기 어려운 세상이다. 세종대왕은 백성의 생각을 편하게 펴게 하려고 훈민정음을 만들었다.

김종심(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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