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의사의 윤리

  • 입력 1998년 5월 16일 19시 30분


치료를 중단하면 사망할 가능성이 큰 환자를 가족의 요구에 따라 퇴원시켜 숨지게 한 의료진에게 살인죄가 인정돼 의료계 안팎에 파문이 일고 있다. 의사의 직업윤리와 우리의 척박한 의료현실을 동시에 생각하게 해주는 하나의 ‘사건’이 아닐 수 없다.

재판부는 “의사가 환자가족에게 퇴원하면 환자가 사망할 가능성이 높다며 여러차례 퇴원을 만류한 사실은 인정된다”며 “그러나 치료를 중지하면 곧바로 숨진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회복가능성이 높은 환자를 퇴원시킨 것은 환자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 치료를 계속해야 할 의사의 의무를 저버린 행위로 처벌이 마땅하다”고 판시했다. 이 판결은 인간의 생명보호라는 의사의 기본적 책무가 다른 어떤 것보다 우선한다고 판단, 그동안 환자나 환자가족의 요구가 있으면 환자를 퇴원시켜 온 의료계의 관행을 인정하지 않았다는 데 큰 의미가 있다. 즉 우리 사회에 만연한 인간생명 경시와 물질지상주의에 대한 준엄한 경종을 울린 것으로 볼 수 있다. 치료비가 없다며 환자인 남편을 억지로 퇴원시킨 아내에게도 똑같이 살인죄를 인정한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이에 대해 의료계는 “의료현실을 무시한 판결”이라며 크게 반발하고 있다. 대한의사협회는 성명서를 통해 “이번 판결은 환자의 퇴원 여부를 친권자 의사에 따라 결정해 온 의료현실과 관행을 고려하지 않은 무리한 법적용으로 승복할 수 없다”고 밝혔다. 의료계의 이같은 반발은 충분히 이해가 간다. 우리의 의료현실은 그야말로 가치혼란마저 일으킬 만큼 각박하다. 환자의 생명을 보호해야 하는 의사로서의 의무와 치료비 등의 문제로 퇴원을 원하는 환자 또는 환자가족의 요구가 상충하는 일은 일선 의료현장에서 비일비재다. 이런 경우 월급을 받는 의사가 자신의 의무에만 충실하기가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환자가족의 퇴원요구를 거부했을 때 발생하는 치료비 입원비 등의 손실을 어떻게 처리하느냐가 문제인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이번 판결을 문제시할 수는 없다. 인명중시와 의사의 의무를 ‘반드시 지켜야 할 가치’로 판단한 판결은 옳기 때문이다. 아무리 의료현실이 각박해도 환자가족이 원한다고 해서 인공호흡기를 떼내고 퇴원시켜 환자가 죽게 한 것은 의사로서 할 일이 아니다.

결국 의사가 의사로서의 의무를 충실히 해 나갈 수 있도록 의료환경을 개선해나가는 것이 숙제로 남는다. 대한의사협회의 지적대로 보호자의 적극적인 퇴원요구를 의료인이 거부할 수 있는 법적 제도적 장치를 갖추는 것이 시급하다. 정부는 이 문제를 해결할 책임이 있다. 의사들도 스스로 의료현실을 개선해 나가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