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육정수/화합의 분기점

  • 입력 1998년 2월 23일 19시 14분


추석이나 설 명절때 서울에서 승용차로 귀성하다 보면 영호남의 갈등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곳이 있다. 경부 호남고속도로가 갈라지는 회덕분기점. 경부선은 대개 이곳부터 체증이 풀린다. 반면 호남쪽은 여전히 여러 줄로 길게 늘어서서 진입을 기다려야 한다. 호남인들은 시원하게 달리기 시작하는 저쪽을 보고 화가 난다. 영남쪽은 비행기와 열차편이 발달해 고속도로를 이용하는 사람이 상대적으로 적다는 뜻이다. 이런 분석이 맞는지 모르겠으나 그렇게 믿는 사람이 많다. 지난날 호남인들은 정치 사회적으로 많은 소외감을 느끼며 살아왔다. 소외감은 주로 공직인사와 지역개발의 차별에서 기인한 게 아닌가 싶다. 박정희(朴正熙) 전두환(全斗煥) 노태우(盧泰愚) 김영삼(金泳三)대통령으로 이어진 ‘영남정권’은 지역갈등의 골을 점점 깊게 만들었다. 호남출신은 좀처럼 요직에 앉히지 않아 그들은 일찌감치 포기하는 게 보통이었다. 다수의 민간기업과 은행 등에서도 사정은 비슷했다. 청와대는 물론 검찰 안기부 등 권력기관 요직과 군(軍)장성의 경우 호남출신은 가뭄에 콩 나듯 했다. 개각때는 구색맞추기로 한두명 끼워넣는 ‘안배’의 대상일 뿐이었다. 80년 광주민주화운동 과정의 유혈사태도 길게 보면 이런 차별분위기의 연장선에 있다고 보는 사람도 있다. 영남정권 37년간에 걸친 그들의 한(恨)은 몇마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다. 사정은 뒤바뀌고 있다. 정권인수조직에 이어 새 정부의 장차관급을 비롯한 요직인선 윤곽이 차례로 드러나면서 그런 느낌이 더해진다. 선거는 정치세력의 교체라는 의미에서 불가피한 측면도 없지 않지만 ‘힘있는 자리’에 이미 발탁됐거나 하마평에 오른 인사들 가운데 호남출신이 부쩍 눈에 띈다. 일부 기업 은행 등도 덩달아 호남출신을 찾느라 부산하다. 부인이 호남인이라는 점까지 가세하는 세태다. 비호남인들은 침묵 속에 추이를 지켜본다. 공직사회에서 영남출신, 그중에서도 PK(부산 경남)와 낙선한 대선후보의 동문인 KS(경기고 서울대법대) 등은 좌불안석이다. 김대중(金大中·DJ)차기대통령은 누구보다 화합의 정치를 강조해왔다. 전 국민의 화합과 단합을 이루어내지 못하면 극심한 경제난 극복마저 어려운 상황이다. 지난해 대선을 앞두고 비호남인 가운데는 “지역감정을 해소하기 위해 이번에는 DJ가 되는게 좋겠다”고 희망하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해묵은 지역갈등을 풀어갈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맞은 셈이다. 요직에 한 지역 인사를 중점적으로 기용하면 해당 조직과 나라에 미칠 여파는 뻔하다. 역대 정권과 똑같이 지역갈등을 심화시킬 수 있다. 영남정권의 잘못이 호남인 우대에 정당성을 부여해 주지는 않는다. 홀대받은 데 대한 보상심리가 작용한다면 악순환을 각오해야 한다. 비호남인들이 지나치게 의구심과 경계심을 갖는 것에도 문제는 있다. 작용에는 반작용이 따르게 마련이다. 이제 결단코 그런 불행한 역사의 고리를 끊을 때가 됐다. 왜곡된 인사의 폐해는 조직의 안정을 고려하면서 순리적으로 바로잡아야 한다. 하루 아침에 고치려 들면 부작용만 낳는다. 국민회의는 비록 ‘지역당’이라는 비판도 받아왔지만 지금은 전국민이 선거를 통해 선택한 집권여당이다. 출신지역을 가리지 않고 인재를 등용하는 초석을 놓을 역사적 책임이 있다. 육정수<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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