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납치사건①]中情 「KT공작」긴박했던 5박6일

  • 입력 1998년 2월 19일 07시 03분


73년8월8일 오후 1시19분 일본 도쿄(東京)시내 한복판에 위치한 그랜드팔레스호텔 2212호 스위트룸 앞 복도. 신병치료차 일본에 머물고 있던 양일동(梁一東)통일민주당 당수를 만나고 나오던 김대중(金大中)씨는 건장한 체격의 괴한 6명에게 납치돼 옆방인 2210호로 끌려갔다. 괴한들은 김씨를 침대에 눕히고 마취제를 묻힌 수건을 코에 갖다 대 정신을 혼미하게 만든 뒤 엘리베이터로 끌고내려와 지하주차장에 대기시킨 차에 태우고 도주했다. 국가 정보기관의 치밀하고 조직적 범죄인 ‘김대중납치사건’, 이른바 ‘KT공작’의 서막은 이렇게 시작됐다. 본보가 단독입수한 ‘KT사건행동별 관여인사 일람표’에는 김대중납치사건에 참여한 중앙정보부 인사들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돼 있다. 최고책임자인 이후락(李厚洛)중앙정보부장―이철희(李哲熙)정보차장보―하태준(河泰俊)해외정보국장(8국장)이 납치사건의 수뇌부를 이루고 있다. 또 윤진원(尹鎭遠)해외공작단장은 현장총지휘, 중정 해외요원인 김기완(金基完)주일대사관공사와 윤영노(尹英老)참사관은 재일(在日)활동책을 맡았다. 이들 휘하의 중정요원들은 납치 및 각 이동구간별로 9개조로 나뉘어 치밀한 사전준비를 했다. 9개조는 △행동대(납치조) △도쿄→오사카 △오사카안가(安家) △오사카안가→오사카부두 △오사카부두대기 △오사카→부산 △부산→서울 △서울안가 △안가→김대중가 이동조. 여기서 가장 관심을 끄는 것은 팔레스호텔에서 누가 김씨를 납치했느냐 하는 것. 지금까지도 김씨의 납치범은 베일에 싸여 있었다. 하지만 일람표를 보면 그들의 신원은 낱낱이 드러난다. 사건의 현장총책임자인 윤진원해외공작단장과 주일대사관의 한춘(韓椿) 김병찬 홍성채(洪性採)1등서기관, 유영복(劉永福) 유충국(柳忠國)2등서기관이 김씨를 직접 납치한 중정요원이다. 또 유충국 홍성채 유영복씨와 김기도(金基燾)오사카영사 등은 현지 정찰의 임무를 맡아 김씨를 납치하기 전 김씨의 일정과 움직임, 일본 경시청 동향 등을 파악했다. 납치범 6명 중 김병찬과 유충국은 호텔 현장에서 사라졌고 나머지 4명이 김씨를 차량 뒷좌석 바닥에 밀어넣고 오사카쪽으로 달아났다. 운전은 유영복이 맡고 윤단장은 김씨와 줄곧 동행하며 구간마다 현장을 지휘했다. 도쿄∼오사카간 고속도로를 5∼6시간 달린 후 도착한 곳은 오사카 인근의 중정 안가. 사건후 김씨는 “도쿄에서 어딘가로 고속도로를 달리던 중 괴한들이 ‘안의 집’으로 가자는 대화내용을 들었다”고 진술했었다. 이때문에 ‘안의 집’이 과연 누구의 집인지를 놓고 추론이 분분했다. 오사카총영사관 운전사인 안용덕(安龍德)씨가 한때 의심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본보가 입수한 문서에는 목적지가 ‘대판(大阪)안가’로 명시돼 있다. 따라서 ‘안의 집’은 중정 안가를 지칭하는 은어일 가능성이 높다. 안가에는 도쿄에서 온 4명외에 박승민(朴勝民) 김기도 김명기(金命起) 박성일(朴聖一) 김봉실(金鳳實·여) 등 5명이 대기중이었다. 김씨는 윤단장 등에 의해 어느 빌딩 차고를 통해 엘리베이터를 타고 다다미방으로 끌려갔다. 김씨는 당시 “거기에서 젊은 여자 목소리를 들었다”고 진술했다. 문제의 ‘젊은 여자’는 안가의 타자수인 김봉실이었던 셈이다. 이중 김명기는 안내 및 연락을 맡은 것으로 돼 있다. 안가는 후일 오사카 총영사관의 숙소로 사용된 엑셀 오카모토(岡本)빌딩 302호로 밝혀졌다. 이들은 김씨의 팔을 묶은 새끼줄을 풀어 다시 단단히 묶고 코를 제외한 얼굴전체에 화물포장용 테이프를 붙인 뒤 다시 김씨를 차에 태웠다. 다음 목적지는 오사카 부두. 납치에 직접 관여한 4명은 김씨를 총영사관 운전사 안용덕이 모는 차에 태워 부두로 끌고간 뒤 부두에 대기중이던 용금호 선원, 그리고 선원으로 위장한 중정요원 박정열(朴廷烈) 정운길(鄭雲吉) 등과 접선한다. 비밀문서에 따르면 용금호는 5백36t의 화물선으로 5백마력 엔진 2개를 장착한 대북공작선이다. 44년에 건조돼 72년 2월 중앙정보부가 해군으로부터 넘겨받은 배로 화물선으로 위장, 일본에 취항하고 있었으며 북한의 공작침투 저지가 주목적이었다. 용금호는 납치사건후 일본 경시청의 주목을 받자 ‘유성호’로 이름을 바꾸고 공작활동을 계속하다 배안에서 벌어졌던 엄청난 비밀을 안고 75년 해체된다. 용금호의 선원들은 대부분 당일까지 자신들이 무슨 일에 동원됐는지를 몰랐다. 이들은 선원으로 위장, 승선한 정운길이나 박정열의 지시에 따라 김씨를 태운 용금호를 부산까지 운항했다. 그 과정에서 입밖에 낼 수 없는 비밀을 알게 되지만 중정측의 회유와 협박 등으로 비밀을 발설하지 못했다. 용금호는 김씨를 납치한 다음날인 9일 오전8시45분 오사카부두를 출발했다. 일본 해상보안부 기록에 따르면 내해(內海)를 따라 관문해협을 통과한 것이 10일 오전9시54분이다. 배안에서 벌어진 일들에 대해서는 김씨와 선원 사이의 진술이 크게 엇갈린다. 김씨는 “범인들이 내려와 오른손에 추를 달고 두 다리도 묶은 후에 50㎏쯤의 추를 달았다. ‘살려주십시오’라고 기도했다. 배가 미친 듯이 움직이기 시작했을 때 갑자기 ‘비행기’라는 소리가 들렸다. 해상자위대나 미군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쿵’소리와 함께 하늘에 빨간 불이 반짝 반짝 보이는 것 같았다”고 말했다. 하지만 본보취재팀이 만난 선원들은 “비행기는 없었다. 죽이려는 것 같지도 않았다”(당시 용금호 통신장 정용석·鄭容碩씨의 증언)고 말했다. 관여인사 일람표가 맞다면 용금호 선상에는 중정요원으로는 정운길 박정열 두 사람밖에 없었다는 얘기가 된다. 만일 바다에 수장시키려는 의도가 있었다면 상식적으로 납치를 주도한 윤단장 등 책임자급이 승선했을 가능성이 높다. 어느 진술이 옳은지는 좀 더 정밀한 조사가 필요한 대목이다. 한국측 수사본부의 발표에 따르면 용금호가 부산 앞바다에 도착한 것은 8월11일 깊은 밤이었다. 배속에서 하룻밤을 지낸 뒤 12일 오전7시 부두에 접안했다. 부두에는 김진수(金珍秀)중정8국 일본과장, 강제원(姜濟元)8국공작단2과장, 용금호 선원들의 뒷수습을 맡은 윤석만(尹錫萬)8국공작단 풍진호선박운영책, 김선배(金仙培)의무실장, 김실장의 운전사가 나와 있었다. 김실장은 잠시 김씨의 건강상태를 진찰한 뒤 대기시켜둔 앰뷸런스에 김씨를 태우고 곧장 서울로 향했다. 서울에 도착한 것은 12일 오후. 하태준(河泰俊)해외공작국장이 직접 나와 김씨를 확인했으며 안가로 김씨를 데려가 하룻밤을 머물고 13일 밤 동교동부근에 김씨를 내려놓고 도주했다. 안가에서 김씨를 자택까지 데려가는 일은 강제원과장과 8국공작단 요원인 이휘윤(李暉潤)소령, 공작단 운전사가 맡았다. 일람표를 분석해보면 김씨의 납치공작은 세밀한 사전계획에 따라 이뤄졌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적어도 수십일에서 수개월에 걸쳐 치밀한 준비를 거친 후 공작에 착수한 것으로 보인다. 상당한 시일 동안 김씨의 동태를 감시했을 것이고 위험성이 큰 만큼 공작에 참여할 중정요원들의 선발에도 상당한 공을 들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사선을 넘어 서울 동교동 자택에 도착한 김씨는 5일간의 피랍과정을 생생하게 증언했다. 하지만 요란하게 설치했던 특별수사본부(본부장 정명래·鄭明來 당시 서울지검공안부장)는 사건 1년 뒤인 74년 8월14일 아무런 성과없이 수사를 중지했고 또다시 1년 후인 75년 7월21일 수사를 종결했다. 수사본부는 당시 “용금호와 관련자들에 대해 치밀하고 광범위하게 수사했으나 이렇다할 특이점을 발견하지 못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치밀하고 광범위한 수사’를 했다는 증거는 찾기 어렵다. 〈특별취재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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