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김종석/「시간끌기」 재벌개혁 안통한다

  • 입력 1998년 1월 22일 19시 46분


또다시 ‘재벌 길들이기’가 진행되고 있다. 이번에는 비록 국제통화기금(IMF)이라는 외압에 의한 불가피한 개혁이기는 해도 역시 여론을 등에 업은 신집권세력의 압박과 재벌들이 알아서 성의표시를 해야 하는 눈치보기는 과거에도 여러번 보았던 장면이다. 아마도 재벌 길들이기는 정권이 바뀔 때마다 찾아오는 계절병인 모양이다. ▼ 이전과는 경우 전혀 달라 이런 관행이 30년 이상 반복되다 보니 재벌 입장에서도 이번에도 시간만 잘 끌면 과거처럼 적당히 유야무야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을 가질 수도 있을 것이다. 정권은 유한하지만 재벌은 영원하다는 말이 생기게 된 것도 따지고 보면 다 이런 배경 때문인 것이다. 최근에 발표된 일부 재벌들의 구조개혁 방안을 보면 이번에도 이렇게 해서 적당히 시간만 끌고 지나가자는 생각이 깔려 있다는 의구심을 버릴 수 없다. 그러나 지금의 재벌개혁 요구는 과거 몇차례 신집권세력들의 세력과시를 위한 조치와는 그 배경이 기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번에는 정치권력이 아니라 국제금융시장과 이를 지배하고 있는 시장원리라는 엄청난 힘에 의해 재벌개혁이 강요되고 있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다만 그 시기가 정권교체기와 우연히 일치할 뿐인 것이다. 그러나 지금처럼 자발적으로 성의표시 한번 해보아라, 아니면 강제로 해버리겠다는 방식으로는 재벌개혁이 제대로 되지 않을 것이다. 특히 개인재산을 얼마나 내놓는 것이 적정한 수준이라든지, 어느 기업은 어느 사업에서 손을 떼야 한다든지 하는 것은 본질에서 벗어나는 일이다. 기업은 하나의 생명체와 같아서 주어진 환경에서 생존을 위해 최선을 다해 적응해나가는 개체인 것이다. 기업의 행태는 대기업이든 중소기업이든 그 기업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의 산물에 불과한 것이다. 따라서 재벌들의 잘못된 경영행태를 놓고 기업주들의 의식구조나 소유구조를 탓하는 것은 정확한 인식이 아니다. 지금 우리나라 재벌들의 팽창위주의 방만한 경영풍토와 낮은 경쟁력, 전근대적인 족벌경영체제 등이 문제로 지적되고 있다. 물론 고쳐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바람직하지 못한 경영관행은 60년대 이후 우리나라의 정치사회적 풍토에서 저절로 누적된 하나의 관행이고 문화인 것이다. 서방 선진국의 대기업 총수가 한국에 와서 기업을 경영한다고 하더라도 지금 우리나라의 재벌 기업인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재벌개혁은 재벌들이 외압에 못이겨 제시한 개혁방안이 국민정서와 여론에 얼마나 부합하는지를 따지는 인민재판식이 되어서는 안된다. 재벌들이 바뀌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도록 기업환경을 바꾸어,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고 개혁하는 기업은 살아남고 변화를 거부하는 기업은 도태되도록 만들어야 한다. 재벌들을 경제위기의 주범으로 몰아서 이들을 한번 혼내주겠다는 식의 발상으로는 과거의 실패한 재벌 길들이기와 하나도 다를 바가 없게 될 것이다. ▼ 스스로 생존위해 불가피 정부와 정치권은 이번에는 재벌들이 진정으로 바뀌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는 점을 믿도록 하고, 재벌들은 지금 그들에 가해지고 있는 구조개혁 압력이 그들을 길들이거나 벌주기 위한 일과성의 조치가 아님을 알아야 한다. 지금 재벌들에 요구되고 있는 구조개혁은 그들의 생존과 우리나라 경제 전체의 미래가 걸린 피할 수 없는 개혁임을 알아야 한다. 예전 같으면 집권세력과 대화도 할 수 있고 시간을 끌면 적당히 지나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번 만큼은 경우가 다르다. 이번 재벌들의 자체개혁에 대한 평가는 새 정권이 하는 것이 아니라 눈물도 피도 없는 ‘시장’이라는 무서운 비인격적 기구가 담당하게 된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재벌은 유한하지만 시장은 영원하기 때문이다. 김종석(홍익대교수·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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