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대통령 사과 이후

  • 입력 1997년 12월 11일 19시 59분


김영삼(金泳三)대통령은 나라가 부도위기에 빠진 모든 책임이 대통령 자신에게 있다고 사과했다. 날마다 자신을 매질하고 번민 속에 잠을 이루지 못한다고도 했다. 이 사과담화로 나라를 이 지경에 빠뜨린 대통령에 대한 국민의 원망이 얼마만큼 가라앉을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임기중 다섯번이나, 그것도 올 한해에 세번씩이나 대통령의 사과를 들어야 하는 나라의 체면도 말이 아니다. 김대통령이 사과담화를 발표한 바로 그 순간에도 달러환율은 사상 최초로 1천7백원대를 넘어섰고 그로 인한 기업 환차손이 하루 동안에 6조5천억원에 이른다는 충격적인 소식이다. 국제통화기금(IMF)의 구제금융에도 불구하고 금융시장이 공황에 빠져 기업과 금융기관이 공멸의 위기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외국의 관측자들은 한국이 이미 국가파산상태에 이르렀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김대통령의 담화가 이러한 「국가파산」을 추스르는 데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다면 그보다 더한 다행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사태는 그렇게 낙관적이지 못하다. 비록 이번 담화가 자신의 국정지표였던 개혁과 세계화의 실패를 자인하고는 있지만 당장 발등에 떨어진 불을 끌 처방이 보이지 않는다는 불만의 목소리도 높다. 백약이 무효인 상태에서 실패한 임기 말 대통령에게 긴급처방을 기대한다는 것 자체가 무리라는 것이 비극의 본질일지도 모른다. 어쨌든 김대통령이 IMF와의 합의내용을 차질없이 이행하겠으며 차기 대통령 당선자와 긴밀히 협의하여 경제회생과 민생안정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약속한 것은 일단 긍정적으로 평가할 만하다. 지금 우리 정부의 국제적 신뢰도는 일부 외국 언론이 차기 대통령 조기 취임까지 조심스럽게 거론할 정도로 최악의 상황에 와 있다. 외국 금융자본은 우리의 대통령선거와 그 이후의 추이를 면밀히 주시할 것이다. 누가 됐든 차기 대통령 당선자는 IMF의 권고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여 김대통령과 긴밀히 협력하면서 국가신뢰도를 높이는 일에 적극 나서야 할 것이다. 김대통령은 이번 담화에서 파국의 책임을 모두 자신에게 돌렸다. 대통령으로서 당연한 자책일 것이다. 그러나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도록 위기를 호도하거나 방치한 경제정책 담당자들의 정치적 행정적 책임을 이대로 덮어둘 수는 없다. 경제정책 담당자들은 발등에 떨어진 위기 앞에서도 대통령과 국민을 수없이 속여왔다. 이들을 어느 시기에 어떤 형식으로든 문책하지 않고는 정책의 실패를 거듭하지 말란 법이 없다. 반드시 누구를 벌주자는 차원이 아니다. 이번 기회에 국가 위기관리 능력을 철저히 점검하고 개선한다는 차원에서 경제파탄을 가져온 정책담당자들의 문책을 약속해야 한다. 국민도 일단 정부를 믿고 당장 금융부터 살리는 일에 모두 발벗고 나서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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