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자노트]김세원/가자! 남대문으로

  • 입력 1997년 11월 28일 07시 45분


신혼여행이나 여름휴가는 해외로 가고 해외 유명브랜드 제품을 선물로 주고 받으며 주말마다 콘도로 놀러가던 잔치는 끝났다. 환율 사상최고, 주가 사상최저, 기업들의 도산 행렬, 사무직 실직자들의 양산…. 들려오느니 답답하고 우울한 얘기들뿐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속상한 것은 내가 살던 나라가 선진국의 문턱에서 부도를 막기 위해 엄청난 빚이나 얻어쓰는 삼류국으로 곤두박질쳤다는 사실이다. 우리 집 잘 산다고 뻐기고 다니다 아버지 사업이 부도가 나 온 가족이 거리에 나앉게 된 부잣집 아이의 심정이 이럴까. 「한강의 기적」을 일궈낸 세계 11위의 교역국이 무참히 주저앉은 이유가 국민의 과소비와 기업의 무절제 탓이라고 떠넘기는 처사가 괘씸하긴 하지만 정부말대로 어려운 경제형편은 허리띠를 졸라매면 헤쳐나갈 수 있다. 문제는 우리들의 형편없이 구겨진 자존심, 죽어버린 기를 어떻게 살려내느냐다. 『대책이 없다』며 이민이나 가야겠다는 패배론이 사회 전체에 깔려 있고 기업마다 구조조정이란 이름으로 감원에 혈안이 되다 보니 「몸사리기」가 지나쳐 자포자기 수준으로 발전했다. 사람들끼리 모였다 하면 약속이나 한 듯 『뭐좀 신바람나는 일이 없을까』를 되뇐다. 아닌 게 아니라 한 모금이면 죽은 사람도 살려낸다는 전설의 샘처럼 찌그러든 우리들에게 신바람을 불어넣어 줄 그런 곳이 간절하다. 나는 일이 잘 풀리지 않으면 남대문시장엘 간다. 그곳은 언제나 활력이 넘친다. 이제는 한국을 소개하는 관광책자에 등장할 정도로 명물이 돼버린 리어카상인들의 삼삼칠박수, 카우보이 옷차림에 희한한 동작으로 손님을 불러모으는 상가의 홍보맨들, 산더미같이 쌓인 온갖 상품들…. 인파를 비집고 들어가 이것저것 헤치며 제품을 고르는 재미도 쏠쏠하거니와 흥정만 잘 하면 덤도 얻고 깎을 수도 있어 부자가 된 듯한 느낌이다. 꼭 대형시장이 아니어도 좋다. 세상살 맛이 나지 않을 때 어디든 가까운 재래시장으로 가보시라. 그곳엔 등푸른 고등어처럼 싱싱하고 따끈따끈한 군밤처럼 따스한 삶이 퍼덕이고 있다. 기가 죽어서는 아무 것도 못하지만 신바람만 나면 온몸을 던져 일하는 우리들의 끼를 그곳에서 되살려보자. 김세원(문화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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