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낙엽」을 찾아서…

  • 입력 1997년 10월 23일 08시 01분


빈 산 빈 강 빈 들 그리고 빈 가슴. 늦가을 낙엽에 비듣는 소리. 철렁 가슴이 내려 앉는다. 『올 한 해도 자갈길의 빈 수레처럼 투덜대며 살았어…』. 그렇다. 어느날 문득 살아온 발자취를 뒤돌아보면 삶의 도처에 검은 얼룩이 어지럽게 찍혀 있다. 악취가 난다. 부끄러워라. 낙엽이 발목을 적신다. 샛노란 은행잎, 붉은 단풍잎, 황갈색의 활엽수잎들이 골목에서 뛰노는 아이들처럼 깔깔대며 도심의 거리를 떼지어 몰려 다닌다. 서울 덕수궁 돌담길, 태릉 푸른동산에서 태릉사거리에 이르는 길, 휘경동 경희대 삼거리에서 산림청에 이르는 길은 손에 손을 잡은 연인들의 발길이 잦다. 11월초에서 중순까지가 절정. 힐튼호텔에서 하얏트호텔에 이르는 1㎞의 남산순환길도 노란 병아리떼 같은 은행잎들이 옹기종기 모여 수다를 떨고 있다. 그러나 누가 뭐래도 대관령 옛길의 호젓한 오솔길에 보살들처럼 누워 있는 낙엽들을 빼놓을 수 없다. 제몸을 썩혀 새 생명을 키우는 대관령 숲속의 나뭇잎들은 이제는 모든 것을 주어버려 가진 것 없는 늙은 어머니 같다. 그래서일까. 대관령 옛길의 낙엽들을 밟으면 발밑에서 새싹들의 속삭이는 소리가 들린다. 『애들아 어서 일어나렴. 새봄이 멀리서 오고 있단다』 새벽녘 물안개가 다발로 피어오를 때 자식놈 손을 잡고 대관령 옛길의 낙엽을 밟으며 한번 걸어보라. 더운 숨 몰아쉬며 발그레 달아오른 자식놈의 볼이 봄기운에 젖은 연초록 새싹들 같지 아니한가. 자식놈 잔등에 모락모락 피어 오르는 더운 김이 봄날의 아지랑이 같지 아니한가. 늦가을 나이의 중년 인생. 언젠가 우리도 나뭇잎처럼 담담하게 뿌리로 돌아갈 수 있을까. 대관령 옛길은 대관령 윗반정에서 대관령 박물관에 이르는 약 4.6㎞. 경사가 심하지 않아 아이들도 쉽게 걸을 수 있다. 편도 2시간 정도. 문득 삶이 허허로울 때는 아무래도 계룡산 갑사의 오리숲길을 걸어야 한다. 해탈문으로 이어지는 오리숲길 옆 실개천 주변에는 몇년씩 곰삭은 나뭇잎들이 큰대자로 누워 참선들을 하고 있다. 일상의 삶에 바쁜 서울사람들은 가까운 북한산 송추계곡을 찾아 여기저기 낙엽을 즈려 밟으며 소요(逍遙)해 봄이 어떨까. 삶에 지친 늙은 노새의 투레질은 추하다. 땅에 겸허하게 몸을 뉘고 그 몸마저 뿌리로 줘버리는 낙엽은 아름답다. 한밤 지붕위를 쏜살같이 밟고 지나가는 바람들의 발소리. 바람떼의 질주에 나무들이 깜짝깜짝 놀라며 몸을 부르르 떤다. 나뭇잎이 또 우수수 떨어진다. 그믐밤, 하늘엔 「떨어져 나간 모나리자의 눈썹 한 개」가 덩그러니 걸려 있다. 낙엽은 그믐달이다. 〈김화성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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