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아닌 학생」 재수생 『쓴잔 다시 들 수 없다』

  • 입력 1997년 9월 9일 07시 57분


두달하고 열흘 남은 대학수학능력시험. 시계초침소리에도 조급함을 느끼기에는 고3 현역이나 재수생이나 마찬가지다. 그러나 이미 한차례 쓴잔을 들이켜본 재수생들은 초가을 바람소리에 밤잠을 설치고 만다. 또다시 실패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머리를 짓누르기 때문이다. 서울 D학원생 김모군(18). 지난 몇달 동안은 지난해 죽을 쑨 수능시험이 후회스러운 하루하루였다. 거리에서 번듯한 대학생 친구와 마주치기라도 하면 하루종일 우울했다. 독서실에서 고교후배와 나란히 앉게 되면 자존심이 상해 바늘방석이었다. 친구의 한살아래 여동생을 만나면 고개를 들 수 없었다. 놀 곳도 쉴 곳도 없었다. 봄에는 대학생 친구들을 만나 술을 마시기도 했지만 싫었다. 『재수생이 무슨 돈이 있냐』는 비아냥이 싫어 매주 10만원을 넘게 썼다. 오로지 저희들 얘기뿐. 그러다 보니 고교친구는 없어지고 학원친구만 생겼다. 무엇보다 어른도 학생도 아닌 처지가 견디기 어려웠다. 담배를 배우기는 했지만 담뱃가게 주인이 『학생한테 팔 수 없다』고 하면 할말이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이런 불만은 문제가 아니다. 오로지 이번의 수능시험을 혹시 지난해처럼 그르치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뿐이다. J학원에 다니는 송모군(18)은 학원친구들과 가끔씩 당구장이나 노래방을 찾는 게 유일한 낙. 젝스키스의 「학원별곡」을 목청껏 부르고나면 속이 후련해졌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 곧장 불안감이 엄습한다. 첫번째 도전에 실패한 이후 이런 생활의 연속이었다. 교과서와 참고서를 화장실에 몽땅 처박아 버려야겠다는 생각이 불쑥불쑥 들기도 했다. 그러나 어차피 시작한 길. 마무리를 잘하고 싶지만 이번에는 웃는 얼굴로 부모님 얼굴을 대할 수가 있을지…. 재수생 중에는 실낱 같은 희망을 붙잡기 위해 감기는 눈꺼풀을 억지로 치켜올리는 노력파들도 많지만 대학에의 꿈과 자꾸만 멀어져 가는 이들도 적지 않다. 대부분 부모님에게 등을 떼밀려 억지춘향격으로 재수학원을 드나드는 부류다. 이모양(17)은 재수생활 동안 포켓볼 실력과 주량만 늘었다. 학교 다닐 때는 선생님에게 성적문제 말고는 꾸중 한번 듣지 않은 「생활 모범생」이었다. 그러나 몇달동안의 재수생활을 통해 쌓여만가는 스트레스가 이양을 하루아침에 「불량학원생」으로 만들어 버렸다. 학원에 있는 시간보다 술집에 있는 시간이 더많은 게 요즘의 이양 모습이다.어차피 실패의 경험이 있는 이양은 『모두 팽개친 채 나를 파괴하며 살자』는 생각이 들 정도다. 『재수생은 한번 쓰러진 경험이 있기 때문에 심적으로 매우 위축되어 있다. 또다시 실패할 수 없다는 중압감으로 인해 평소 실력도 보여주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의욕은 있지만 초조하기 때문이다. 그동안 쌓아온 실력을 믿고 자신있게 밀어붙이는 게 실패를 거듭하지 않는 방법이다』 서울 종로학원 김용근 평가실장의 충고다. 〈전 창·박정훈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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