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쟁력 이대론 안된다]화이트칼라 「시간때우기」많다

  • 입력 1997년 3월 14일 20시 21분


[이영이·박현진 기자] △오전8시―출근, 점심시간까지 신문과 책을 뒤적임 △낮12시∼1시반―점심식사 △오후2∼4시―고객에게 투자자문 △오후4∼6시―독서 △오후6시―퇴근. D증권에 다니는 투자자문가 K씨(31)의 일과표다. 오전중 신문과 책을 뒤적이다보면 눈치가 보여 속이 편치 않다. 오후4시쯤 자문 일을 끝낸 뒤엔 창업 관련서적을 읽는다. K씨는 더이상 회사 다닐 마음이 별로 없다. 매일 수억원의 돈이 오가는 것을 보노라니 회사생활이 성에 차지 않는다. S사에 다니는 Y과장의 사내별명은 「보물단지」. 그의 컴퓨터에는 1백개가 넘는 인터넷 음란사이트 주소가 저장되어있다. 매일 업무시간중 틈틈이 모아온 것이다. 사내정보화를 위해 수백억원을 들여 마련한 정보시스템이 오락도구로 더 소중하다. ▼점심-출근시간 체크 건설수주업무를 해온 H건설의 K이사는 후배들이 한심하다. 수주를 위해 현장을 뛰는 것을 영 귀찮아한다. 『요즘 같은 불황에 괜히 일을 잘못 맡았다가 손해보면 어떡하느냐는 의식이 팽배해 있어요. 그래서 관련 팀을 여러개 만들어 책임을 회피하려고 하죠. 복지부동입니다』 서울 계동 현대그룹 사옥. 정각 오후1시가 되면 1층 로비에 수첩과 볼펜을 든 사람이 나타난다. 점심시간을 넘겨 들어오는 사원들을 일일이 점검, 고과에 반영하기 위해서다. 『단속이 시작된 후론 아예 더늦게, 단속반원이 없는 2시가 넘어 들어오는 사원도 있지요. 토요일에는 아예 오전11시부터 자리를 비우고 곧바로 퇴근하는 사람도 많아요』(사원 C씨) 삼성그룹은 7.4제(오전7시출근, 오후4시 퇴근)를 실시한지 3년이 지난 작년말 사옥 1층로비에 「몰래카메라」를 설치, 출근시간 단속에 나섰다. 의식개혁을 화두(話頭)로 4년째 신경영을 추진하고 있는 삼성그룹이 얼마전 내놓은 자평 중엔 이런 내용이 있다. 「실력은 없이 변하라니까 변하는 시늉만 하는 사례」 「건물과 사무환경은 90년대, 업무내용은 80년대, 사고방식은 70년대」 「자율을 방관으로 착각하고 우선 모면하고 보자는 무책임주의」 「멋대로 하면서 결과엔 아무도 책임 안지는 관리부재현상」. 한국 최고의 관리형 기업으로 불리는 삼성에도 아직 사각지대가 많다는 결론이었다. ▼전문성 부족 걸림돌 쓸데없는 일을 시키거나 구태(舊態)에만 얽매인 상사들도 화이트칼라의 생산성을 떨어뜨리는 존재. 수출입은행 직원들은 수년전 영어를 잘모르는 정치권 실세가 낙하산을 타고 행장으로 내려오는 바람에 계약서를 한글로 번역하느라 밤낮을 보냈다. 이 은행의 특성상 대부분의 업무가 영어로 이뤄지고 있어 프로젝트가 진행될 때마다 번역하는 것은 고역이었다. K사의 L대리는 부장이 부르면 겁부터 난다. 『요것 좀 바꿔보지. 이 글자 좀 키우고…』 같은 내용의 기안서를 붙잡고 서너번씩 고치다 보면 하루해가 진다. 부장은 회사정보망에 띄워도 될 보고사항을 일일이 프리젠테이션자료로 만들라고 시킨다. 지난해 한국경영컨설팅협회에서 펴낸 팀장 리더십 교육지침서는 △사원에게 업무보다 잔심부름 시키는 팀장 △인간관계가 좁아 온종일 책상에만 붙어있는 팀장 △부하에게 회사방침 등의 정보를 전달하지 않는 팀장 등을 피곤한 상사의 유형으로 꼽았다. 『사무직 근로자들의 생산성을 기계적으로 산출하기는 어렵지만 일본의 50%에 불과하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당장 현재 인원의 30%가량을 줄여도 전혀 무리가 없을 만큼 조직이 방만하고 군더더기가 많지요』(삼성그룹 N이사) 『사무직근로자의 생산성을 떨어뜨린 것은 기업이 자초한 측면도 큽니다. 불필요하게 조직과 인력을 늘린 것은 경영자의 책임이지요. 이제 정리해고다, 명퇴다 하는데 늦은 감이 있어요』(현대그룹 종기실 우시언이사) 『직원들도 피해자입니다. 비효율적인 일에 쫓겨 자기계발의 기회를 박탈당하는 경우가 많지요. 직원들의 전문성을 키우는데 회사가 너무 소홀해요』(J사 K과장) ▼회의시간 줄이기 운동 지난해 대구달성상공회의소가 대구지역 사무직 근로자 1백83명을 대상으로 의식구조 조사를 해본 결과 응답자의 52.5%는 과소비풍조와 3D기피현상 등 사회적 분위기가 근로의욕을 저하시키고 있다고 답했다. 화이트칼라 생산성향성을 위한 아이디어도 적지 않다. 삼성데이타시스템은 최근 오전7시에서 9시까지는 회의안하기 전화안걸기 신문안보기의 「3무(無)운동」을 벌이고 있다. 이른바 집중근무제도다. 제일기획도 이달부터 회의시간 줄이기 운동을 시작, 사전자료준비가 소홀하거나 시간을 어기는 직원들에게는 벌점을 매긴다. 『우리는 사람이 자원이라 회의시간을 줄이는 게 가장 큰 경비절감이죠. 덕분에 실제 일할 수 있는 시간이 늘기도 하구요』(안철우전략기획팀차장) 상당수 대기업들은 직원들에게 정규근무시간내 업무처리를 강조한다. 특근을 엄격히 제한한다. 일부 회사는 정규근무시간이 끝나면 불을 꺼버린다. 『시간채우기식 근무가 많습니다. 회사돈만 축내는 거죠. 연월차휴가를 보내도 생산성에 차질이 없습니다』(제일보젤 손춘섭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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