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인홍의 세상읽기]어른을 잘 모신다는 것

  • 입력 1997년 2월 24일 20시 23분


『그러게요, 속 많이 상하셨겠어요』 친정에서 온 전화를 받는 아내의 목소리가 사뭇 심각하였다. 걱정이 되어 아내를 보니 목소리와는 달리 웃음을 참느라고 애를 쓰는 표정이다. 『무슨 이야기인데 그래』 궁금증을 참지 못해 전화를 끊자마자 아내에게 물었다.『어머니가 아버님께 야단 맞으셨대요』 응? 이게 무슨 소리. 고희를 바라보는 연세에 야단을 맞다니. 아내가 들려주는 사연은 이러했다. 시내버스 경로우대권이 얼마 전부터는 현금을 지급하는 것으로 제도가 바뀌었다. 이제는 거주지 동사무소에 신고를 하고 거래 은행의 계좌번호만 알려주면 입금이 된다고 한다. 큰돈은 아니겠지만 사회적으로 대접을 받는다는 상징적인 의미도 있고 실제로 도움도 되는 제도가 아닌가. 더구나 일일이 챙겨 받느라 불편할 것도 없고. 이 편리하고 좋은 제도가 장인 장모 사이에 분쟁을 일으킨 것이다. 장인이 직접 동사무소에 가실 리가 없기 때문에 장모가 가서 대신 수속을 밟겠다고 이야기를 꺼낸 것이 논쟁의 발단이었다. 아니 논쟁이라기 보다는 일방적으로 불호령을 맞으신 것이다. 그것도 무려 30분 동안을. 그리고 나서 그 억울함을 딸에게 호소한 것이 전화의 내용이었다. 장인은 이전에도 경로우대권을 이용하는 것을 매우 싫어하셨다. 장인의 논리는 경로우대권은 꼭 나이로만 따질 것이 아니고 일을 할 수 없는 사람을 도와주는 제도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직 일을 하고 있고 소득세를 내고 있는 당신은 해당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나이 드신 분들한테는 무엇보다도 자존심을 잃지 않으시는 것이 중요한 것 같아』 이 말에 아내도 공감하였다. 『자존심을 유지하도록 해 드리는 것이 어른들을 잘 모시는 방법 중에 가장 중요할 지도 몰라』 아내가 이렇게이야기할 때 나는 속으로 빙그레 웃음을 지었다. 이제 그 동안 아내에게 비판을 받아온 내 행동 중의 일부가 조금이라도 정당화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내는 내가 나이 드신 분들께인사갈 때 깜박 빈손으로 가고 오히려 무엇을 받아들고 오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것이 꼭 내가 철이 덜 나고 막내 티가 남아서 그런 것이 아니라고 우길 근거가 생긴 것이다. 나이드신 분들이 아랫사람들에게 베풀고 싶어할 때 그렇게 하시도록 하는 것도 그분들의 자존심을 지켜드리는 하나의 방법이 될수도 있으니까. 글쎄, 내가 너무 억지논리를 펴는 걸까. 황인홍 (한림대교수 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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