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등소평이후의 중국

  • 입력 1997년 2월 20일 20시 01분


중국의 최고 실권자이며 원로인 鄧小平(등소평)이 93세를 일기로 19일 밤 사망함으로써 개혁 개방의 근대화정책을 추진해온 중국은 그 정신적 기둥을 잃었다. 등소평의 사망이후 중국이 정치적 안정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인지에 세계의 관심이 쏠려 있다. 단기적으로는 국가주석과 당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을 겸하고 있는 江澤民(강택민)당총서기를 중심으로 한 현재의 집단지도체제가 유지될 것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중국의 당(黨) 정(政) 군(軍) 최고 지도기관이 등소평사망 공동발표문에서 등소평의 지도노선을 더욱 충실히 수행할 것과 이를 위해 강택민 당총서기를 핵(核)으로 하는 공산당 중앙을 중심으로 일치단결할 것을 다짐했다는 점에서 당분간은 정치적 이변(異變)이 없을 것으로 예상된다. 또 등소평이 89년 천안문(天安門)유혈사태직후 그의 뒤를 이을 최고지도자로 강택민을 선택, 후계체제를 준비해 왔던 사실에 비추어 그렇게 전망할 수 있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볼 때 강택민을 중심으로 한 현체제가 뿌리를 내릴 것인지의 여부는 오는 10월 중국공산당 제15기 전당대회에서 판가름날 것으로 보인다. 한가지 분명한 것은 중국 권력층의 세대교체와 제3세대의 등장이 가속화할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나 권력승계가 제도화돼 있지 않고 정치와 군의 분리가 이뤄지지 않은 것이 중국 정치체제의 특징이기 때문에 누가 군부를 장악하느냐에 따라 최고실권자가 결정될 것이다. 등소평은 80년부터 정치적으로는 사회주의를 고수하고 경제적으로는 시장경제체제를 지향하는 중국식 사회주의를 도입, 개혁 개방정책을 추진했다. 또 1국2체제를 내세워 홍콩 마카오 등 잃었던 영토를 되찾는 등 중국 근대화에 초석을 놓았다. 20세기들어 毛澤東(모택동)이 공산주의혁명으로 정권을 창출, 30여년간 중국을 통치한 건국의 공로자라면 등소평은 그 뒤를 이어 개혁 개방정책으로 경제발전을 이룩한 중국 근대화의 주역이었다. 중국인에게 큰 재앙을 가져다준 문화혁명을 모택동 사후에 江靑(강청) 등 4인조를 숙청함으로써 청산, 중국을 개혁과 개방의 길로 이끈 등소평의 생애는 이제 그 막(幕)을 내리고 앞으로 중국 역사의 한 장(章)으로 남게 될 것이다. 등소평 사망후 중국은 사회혼란을 막기 위해 개혁 및 개방의 추진을 늦추거나 경제건설의 속도를 낮출지 모른다. 그러나 개혁 및 개방이 돌이킬 수 없는 대세로 자리잡은 만큼 과거의 계획경제체제로 되돌아 갈 수는 없을 것이다. 경제의 시장화에 따라 정치의 민주화를 어느 정도까지 진전시킬 것이며 지역간 계층간의 소득격차와 부정부패를 어떻게 해결하느냐는 것은 현 지도자들에게 맡겨진 과제다. 등소평이 중국의 근대화를 이룩한 위대한 인물로 기록될 것인지, 아니면 천안문 민주화운동을 유혈로 탄압한 장본인으로 남을 것인지 그의 역사적 공과(功過)를 평가하는 것은 전적으로 중국인들이 판단할 몫이다. 중국 정치가 혼란에 빠지면 남북한 정세와 세계정세에 미치는 영향이 클 수밖에 없다. 중국의 정치적 사회적 안정은 한반도 정세의 안정과 세계평화를 위해 매우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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