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김학준-이집트 「수에즈 국유화 40돌」

  • 입력 1996년 12월 23일 21시 00분


올해는 이집트가 수에즈운하를 국유화함으로써 전후(戰後)국제정치에 새로운 획을 그었던 역사적 사건이 마흔돌을 맞이한 해다. 지난 56년 7월 이집트혁명의 주역인 나세르대통령이 영국과 프랑스가 공동관리하던 수에즈운하의 국유화를 선언하자 영 불은 이스라엘과 함께 이집트를 침공했으나 결국 후퇴할 수밖에 없었고 그리하여 56년 12월하순에 이르러 모든 상황이 종결됐던 것인데, 이 사건은 서구식민주의의 실질적 종말을 상징한 것으로 국제정치학자들은 평가한다. ▼脫나세르-親서방 전환 필자는 최근 이집트를 방문하면서 이 역사적 사건의 40주년을 기념하고 있는 이 나라의 표정을 여러 각도에서 살폈다. 우선 두드러지게 눈에 들어온 것은 나세르 추모열기의 전국적 확산이었다. 지난 7월 전국 주요도시들에서 일제히 개봉된 「나세르 56년」이란 영화는 이미 이집트 전체인구의 약 6%에 해당되는 3백만여명의 관객을 동원했는데, 이 흐름은 내년까지 계속될 것으로 전망되고 있었다. 수도 카이로 중심가에 자리잡은 나세르 무덤에 헌화하는 추모객의 발걸음도 늘어나고 있었다. 그러나 또다른 표정을 읽을 수 있었다. 그것은 나세르를 「이집트에 대한 5천년 외세지배에 종지부를 찍은 민족의 영웅」으로 떠받들면서도 그가 남긴 유산에 대해서는 부정적으로 바라본다는 사실이었다. 그 대표적 보기가 사회주의였다. 아직도 전체인구의 절반정도가 절대빈곤에 허덕이는 이집트 경제의 낙후성이 나세르의 사회주의 때문이며, 오늘날 무바라크대통령 정부가 자본주의로의 전환을 시도해도 성과가 시원찮은 까닭이 사회주의가 남긴 폐해가 이집트 사회의 곳곳에 여전히 자리잡고 있는데서 발견된다고 지식인들은 지적했다. 나세르에 대한 이러한 이중적 평가는 바로 오늘날 이집트가 빠져있는 고뇌를 상징한다. 이집트 국민들은 이집트가 「아랍통합의 기수」로, 또는 「제삼세계 비동맹운동의 기수」로 날리던 시절을 그리워한다. 반면 나세르가 부르짖던 「아랍민족주의」가 현실적으로는 허구이며 비동맹운동도 이미 지나간 시대의 흐름에 지나지 않음을 그들은 직시하면서, 이집트가 살 수 있는 길을 탈(脫)나세르화에서 찾는 것이다. 탈나세르화란 국내적으로는 사회주의의 청산이고 국제적으로는 친서방(親西方)정책의 추진이다. 이런 점에서 나세르의 후임자였고 무바라크의 전임자였던 사다트대통령이 새롭게 평가되고 있었다. 그는 이슬람근본주의자들에 의해 암살되고 말았으나 자본주의로의 전환을 시도했고 친미 친서방으로의 전환을 과감히 시도함으로써 탈나세르화의 길을 열었다는 것이다. 무바라크 현직대통령은 처음에는 나세르와 사다트의 중간에 서려고 했다. 그러나 이집트의 현실은 그것을 매우 어렵게 만들었다. 「중동의 맹주」로서의 위신을 지키기 위해서도 역시 서방세계와의 긴밀한 협력을 통해 해외투자를 끌어들이고 자본주의적 경영방식으로 경제를 일으켜야 한다는 것을 뼈저리게 요구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무바라크 정부는 결국 사다트가 열어놓은 길을 따라가기에 이르렀다. ▼한국과 관계 빠르게 개선 이렇게 볼 때 카이로에 약3천명의 요원을 거느리는 「세계최대」의 미국대사관이 상주하고 있다는 사실이 조금도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또 지난날 긴밀했던 북한과의 관계를 냉각시키는 대신 상대적으로 냉대했던 한국과의 관계를 빠르게 증진시키고 있는 것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북한이 세워준 「노동자혁명기념탑」 앞은 한산하고 한국의 대기업들이 여기저기에 세운 한국상품 광고판 앞은 분주한데서 오늘날 이집트 사람들의 표정을 읽을 수 있었다. 김 학 준<인천대총장·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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