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마지막 춤은 나와 함께(192)

  • 입력 1996년 10월 22일 20시 05분


불행한 채로 행복하게 살기〈40〉 그동안 경애는 기혼 여교사의 권리를 찾기 위해 재단측과 열심히 싸웠다. 경애가 아이를 갖자 재단측에서는 교사의 직무수행에 적합하지 않다는 갖은 구실을 대서 경 애의 정식교사 자리를 임시교사로 바꾸도록 서류를 꾸몄다. 부른 배를 내밀고 교장 실을 뻔질나게 드나들며 끝까지 권리를 주장하던 경애도 「임시교사직을 받아들이든 지 아니면 사표를 쓰라」는 말에 결국은 그 서류에 서명할 수밖에 없었다. 형평의 원칙에 의해서 나와 또 한 사람의 기혼 여교사도 같이 그 서류에 서명했다 . 그리고 내가 이혼한 다음달 「재단 방침」이라는 이름의 전지전능한 명분에 따라 기혼 여교사는 한꺼번에 해고를 당했던 것이다. 물론 형식적으로는 새로 이력서를 낸 세명의 남자 교사들이 임시교사인 세 여교사 와의 공개적인 서류심사에서 여교사들을 제치고 뽑힌 것이었다. 교무회의에서 교장이 재단의 방침을 전달했을 때 동료교사들은 아무도 이의를 제 기하지 않았다. 전에도 몇번인가 비슷한 일을 겪었기에 재단에 맞서보겠다는 의협심 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다들 알고 있었다. 해고에서 제외된 나이든 여교사들도 침 묵을 지킬 뿐이었다. 경애는 그 자리에서 감동적인 연설을 했다. 그러나 독실한 기독교도인 교장이 인 자한 웃음을 띠고 세 여선생의 앞날에 「공의의 하나님」의 뜻이 같이하기를 빈다고 화려하게 송별사를 치르자 입술을 깨물고 책상 정리를 하기 시작했다. 송별회 자리 에서 여교사회의 회장인 주임선생은 여교사회의 존립 자체가 위태로워진 이 중대한 사건에 대해 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마지막 수업을 마치고 짐을 싸서 돌아온 날 나는 좁고 어두운 방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나 혼자였다. 아무런 타인도 없었다. 나는 참으로 오랜만에 자유를 느꼈다. 그리고 긴 여행에서 돌아온 사람처럼 이틀을 내리 잤다. 깨어보니 전화벨이 울리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전화벨 소리에 내가 깨어난 것이었다. 그 소리는 마치 나를 죽음에서 깨우는 호출과도 같았다. 가까스로 몸을 일으킨 나는 한 손으로 방바닥을 짚은 다음 다른 한 손을 전화기로 뻗었다. <글 : 은 희 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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