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 인 시네마]<1>―‘빌리 엘리어트’를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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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10월 2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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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위원을 녹인 주인공 빌리의 열정… 무념 무상의 세계 역시 프로는 미쳐야

《영화 속 스포츠는 경기장보다 더 클래식하고 극적이다. 때로는 현실보다 더 생생하고 때로는 현실을 왜곡하기도 한다. ‘스포츠 in 시네마’는 영화 속 스포츠 세계를 돋보기로 들여다보고자 한다. 현실의 스포츠가 더 잘 보일지도 모르겠다.》

11세 소년 빌리 엘리어트에게 발레는 즐거움이다. 발레 전문가들이 빌리를 높게 평가한 것 은 테크닉이 아니라 아무 생각 없이 동작에 흠뻑 젖을 수 있는 마음자세였다. 사진 제공 UPI
11세 소년 빌리 엘리어트에게 발레는 즐거움이다. 발레 전문가들이 빌리를 높게 평가한 것 은 테크닉이 아니라 아무 생각 없이 동작에 흠뻑 젖을 수 있는 마음자세였다. 사진 제공 UPI
영화 ‘빌리 엘리어트’(2000년 개봉)는 파업 중인 영국 북부 탄광촌 마을에서 11세의 소년 빌리가 춤에 대한 열정을 발견하고 가족의 도움으로 발레리노의 꿈을 이루는 과정을 담았다. 뮤지컬로도 만들어진 이 영화 중 스포츠 기자인 내게 가장 인상적인 것은 빌리가 왕립 발레학교 오디션을 본 뒤 심사위원들과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었다.

빌리가 오디션에서 보여준 연기는 객관적으로는 수준 이하였다. 오디션에 온 다른 아이들만큼 정통 발레 교육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빌리의 연기에서 이 아이가 가진 무한한 가능성을 봤다고 믿는 심사위원들이 이를 확인하기 위해 질문을 던진다.

“빌리, 춤출 때 어떤 느낌인가요?”

골똘히 생각하던 빌리가 입을 연다.

“(처음에는) 뻣뻣하지만 일단 시작하면, 모든 것을 싹 잊어요. 마치 사라지듯이요. 맞아요. 전 사라져요. 어, 몸, 몸이 달라져요. 내 안에 갑자기 불이 켜진 것 같아요. 날아요. 새처럼, 전기처럼. 맞아요. 전기처럼….”

심사위원들은 이 답변에 머릿속에 마치 불이라도 번쩍 켜진 듯 깜짝 놀란 표정을 짓는다. 발레에서 테크닉보다 훨씬 중요한 것을 11세에 불과한 어린 빌리가 말했기 때문이다. 발레는 스포츠로 분류되지는 않지만 몸을 쓴다는 점에서 스포츠와 아주 다르다고는 할 수 없다. 바로 몸을 이용해 최고의 퍼포먼스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 절정의 기량은 분명 빌리가 말한 그런 ‘자신이 사라지는’ 상태에서 나온다.

심사위원의 질문에 스포츠 종목을 대입해 보면 빌리가 말한 상태가 얼마나 고수의 영역인지 좀 더 가깝게 다가온다. “야구 방망이를 들고 타석에 들어가면 어떤 느낌인가요?” “축구 경기가 시작되면 어떤 느낌인가요?”

세월이 지나 ‘백조의 호수’가 화려한 무대에 올려지고 이 공연에서 주인공 역할을 맡은 빌리가 한 마리 백조가 날아오르는 듯한 동작으로 무대에 등장하면서 영화가 끝난다.

몇 년 전 한 외국의 축구 팀이 한국의 프로 팀과 친선 경기를 한 적이 있다. 경기가 끝난 뒤 기자회견에서 “오늘 경기를 잘했다”는 외국 감독의 말을 스포츠 용어에 익숙하지 않은 통역이 “오늘 잘 놀았다”고 잘못 전했던 기억이 있다. 플레이(play)라는 표현을 ‘논다’로 오역한 것이다. 하지만 그 순간 스포츠에 참여하는 사람들이나 스포츠를 관람하는 사람들이 잊고 있던 본질을 그 통역이 말했다고 나는 생각한다. 대부분의 스포츠가 바로 ‘놀기’에서 출발했다는 것 말이다. 그리고 스포츠가 ‘놀이의 세계’로 회귀하지 않을 때 빌리가 말한 ‘아무런 생각이 없는 상태’에 결코 도달할 수 없을지 모른다.

피겨 정상에 선 김연아가 꼽는 자신의 최고 연기는 2007년 일본 도쿄에서 열린 세계선수권에서 영화 ‘물랭루주’의 주제곡 ‘록산의 탱고’에 맞춰 연기한 쇼트프로그램이다. 당시 미국의 피겨 전문기자 필립 허시가 “100년이 넘는 피겨 역사에 신기원을 열었다”고 표현한 연기다. 대회가 끝난 뒤 단독 인터뷰에서 김연아가 말했다. “가끔 연기 중에 반쯤 미친 상태가 되는데 이번 쇼트프로그램은 내내 그 상태였다”고. 그때 김연아는 관중의 엄청난 박수 소리도 모른 채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 있었다. 아니 자신조차도 사라진 세계였다는 게 맞다. 바로 빌리가 춤출 때와 같은 세계다.

김성규 기자 kims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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