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 베이스볼] 김성근 감독, 오더만 무려 8가지

  • 입력 2009년 8월 19일 07시 56분


“1∼9번, 승리를 위한 최상의 조합을 찾아라”… ‘타순’의 기묘한 비밀

“야구는 타순을 짜는 일부터 시작한다.”

‘타순(배팅 오더)’은 야구의 시작이자 끝이다. 감독이 야구장에 도착한 뒤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1번부터 9번까지 타순을 짜서 제출하는 것이다. 타순이 정해지면 선수들은 자신의 임무를 파악하고 긴장도를 높인다. 팬들도 야구장에 도착해 가장 먼저 확인하는 것이 타순이다. 아군과 적군의 타순에 따라 감독의 전략과 전술도 달라진다. 단순한 듯 하면서도 복잡한 세계, 타순에 얽힌 기기묘묘한 비밀들을 들여다본다.

○타순의 의미와 기능

타순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비슷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9회까지 타석에 가장 많이 나서는 1번타자는 출루율이 높고 발빠른 타자가 맡는다. 2번은 작전수행 능력과 팀배팅에 능한 타자, 3-4-5번(중심타자)은 정확도와 장타력을 갖춰 득점생산을 해결할 수 있는 타자가 포진한다. 7-9번은 주로 타격이 약하거나 체력소모가 많은 내야수나 포수의 몫이다.

그러나 강팀과 약팀에 따라 타순별 의미가 달라지기도 한다. 현대야구에서는 2번, 6번, 9번에 중요성을 부여하고 있다.

2번타자는 때론 1번타자, 때론 중심타자 기능도 수행해야 한다. 6번타자는 중심타선의 연장이 되고 있다. SK 김성근 감독은 “6번타자는 또다른 5번타자이자 또다른 1번타자”라면서 “두산이 강할 때 보면 6번부터 시작해 3번 김현수가 해결하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다. 6번타자가 강하면 단 한번의 찬스로 타자일순하는 사례가 많다”고 말했다. 9번타자가 1번타자 못지않은 능력을 갖추고 있다면 9번-1번-2번으로 이어지는 ‘3종 테이블 세터’를 장착할 수 있다.

그러나 타선이 약하면 감독으로서는 고민스럽다. 김성근 감독은 “과거 쌍방울이나 LG 감독 시절에는 7-9번은 그냥 넘어가는 타순이었다. 9회까지 3이닝은 상대에게 주고, 나머지 6이닝에 승부를 걸어야했다”고 말했다.

○고정적인 타순, 움직이는 타순

타순에는 감독의 전략과 전술의 씨줄과 날줄이 얽혀있다. 인간은 미래에 대한 예지력이 없지만 최상의 결과를 얻기 위해 과거와 현재를 총동원해 미래를 예측해야만 한다. 감독들은 지난날의 컨디션과 상대전적, 기록을 살펴야하고(과거), 당일 컨디션을 파악해(현재), 승리를 위해 최상의 타순(미래)을 구상한다. 때로는 쉽게 타순이 정해지기도 하지만, 때로는 끝없는 고민을 통해 힘겹게 옥동자가 탄생하기도 한다.

감독의 성향에 따라 타순의 색깔은 달라진다. 최근 대부분의 감독은 타격코치에게 타순 구성의 권한을 일임하고 있다. 한화 김인식 감독이나 두산 김경문 감독, 삼성 선동열 감독, LG 김재박 감독, 히어로즈 김시진 감독 등은 타격코치가 정한 타순을 받아본 뒤 특별한 변동사항이 있을 때만 수정을 가한다. 특히 김인식, 김경문 감독은 부상이나 슬럼프 등 특별한 변수가 없다면 시즌 내내 고정타순이 유지되는 것이 좋다고 여긴다. 타자마다 타순에 대한 역할을 인식하고 적응력과 면역이 생겨야 전력의 극대화를 이룰 수 있다고 본다.

반면 SK 김성근 감독은 타순을 바꾸려고 한다. 가끔씩 타격코치에게 일임하기도 하지만 배팅오더 작성은 웬만해서는 손에서 놓지 않는다. 그는 “오더 하나에 그날의 움직임이 바뀐다. 의사의 처방이 잘못되면 환자가 죽는다”면서 경기가 끝나면 다음날 경기의 타순을 구상하는 작업에 들어가 보통 7-8개의 오더를 만든 뒤 선택을 고민한다고 털어놨다. 그는 “고정타순도 좋지만 선발투수 예고제를 최대한 이용하려면 그에 대응하는 오더가 중요하다. 다만 올해는 알(선수)이 부족해 타순이 크게 변하지 않을 뿐이다”고 주장했다.

롯데 로이스터 감독은 “지난해 고정타순을 선호했다면 올해는 그렇지 않다. 이유는 성적이 안 좋으니까”라고 웃은 뒤 “가장 효율적으로 득점력을 생산할 수 있는 공격력을 꾸미기 위해서다”고 말했다.

○타순의 원칙과 전략

큰 틀에서 ‘고정 타순’과 ‘변화 타순’으로 바라볼 수 있지만 어쨌든 타순은 날마다 크든 작든 조금씩 변할 수밖에 없다. 타순을 구성하는 원칙은 대개 비슷하다. 첫째는 상대성적 고려, 둘째는 타자의 컨디션 파악, 셋째는 상대투수에 대한 전략, 넷째는 흐름과 기세와 직감이다. 1998년 선발투수 예고제가 전면적으로 시행되기 전만 하더라도 종종 ‘위장오더’로 인해 기괴한 선발 라인업이 전광판에 뜨기도 했지만 이젠 그런 풍속은 사라졌다.

KIA 조범현 감독은 “상대 선발투수가 강하면 좌완이냐 우완이냐에 따라 달라지기는 하지만 6이닝 이상 상대할 수 있는 타순을 구성한다. 그러나 상대투수가 약하면 상대 불펜투수를 공략하기 위해 대타와 대수비, 대주자 등을 생각하고 타순을 짠다”고 밝혔다.

히어로즈 김시진 감독은 “투수출신 감독의 경우 대개 좌-우-좌-우 지그재그 타선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승부처에서 상대 핵심 불펜 좌투수가 한 타자만 상대하고 내려가도록 하기 위함이다”고 말했다.

타순을 거의 바꾸지 않는 스타일인 LG 김재박 감독은 “주전과 백업의 전력 차가 크니까 더 그렇다. 다만 상대 좌투수가 선발이면 우타자를 넣는 편이다. 그러나 박용택과 페타지니처럼 좌투수에 강한 데이터를 갖춘 타자는 그대로 쓴다”고 밝혔다.

상대팀에 따라 라인업 구성이 달라지기도 한다. SK 김성근 감독은 “상대에 따라 수비냐, 공격이냐 포인트를 두게 된다. 두산과 만나면 외야진도 수비 위주로 간다. 타구 하나에 한 베이스를 더 갈 수 있는 발 빠른 타자들이 많기 때문이다. 반면 한화타선은 장타력이 있지만 기동력이 약해 우리 수비수도 발은 느리더라도 공격력이 강한 타자로 구성하게 된다. 그러면 타순은 또 달라질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타자에게는 편안한 타순, 부담스러운 타순도 있다. 김시진 감독은 1번타자나 중심타자로 써도 될 황재균을 시즌 초반 부담이 덜한 2번타자로 밀어 넣었다. 그러나 선동열 감독은 시즌 개막전부터 신인 김상수를 미래의 1번타자로 보고 1번에 고정시켰다. 둘 다 방법은 다르지만 선수를 키우기 위한 전략적인 판단이었다.

이재국 기자 keyston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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