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이즈 입으면 ‘원더우먼’ … 여자가 웬 레슬링? 편견 먼저 메쳤다!

  • 입력 2009년 1월 16일 08시 58분


서울시 중구청 여자레슬링팀

《베이징올림픽에서 일본여자레슬링은 금메달 2개와 은메달 1개, 동메달 1개를 따냈다. 출전선수 전원 메달획득이었다.

일본과 비교하면, 아직 한국의 여자레슬링은 걸음마 수준. 세계선수권 입상실적조차 전무하다.

하지만 2005년 여자레슬링이 전국체전정식종목으로 채택되고, 실업팀이 창단하면서 기량이 날로 향상되고 있다.

지난 달 18일에는 서울시 최초로 중구청 여자레슬링팀이 창단, 여자레슬링 부흥에 힘을 보탰다.

이종호(47) 감독이 이끄는 서울 중구청 여자레슬링팀을 만났다. “세상을 메쳐보겠다”는 포부만큼은 이미 금메달감이었다.》

○타이즈에 대한 부끄럼 떨쳐야 진짜 레슬러

올림픽 2연패를 달성한 55kg급 요시다 가오리(26·일본)는 세살 때부터 매트 위를 뒹굴었다. 하지만 한국선수들은 중·고등학교부터 레슬링을 시작한다. 63kg급 한태양(22)은 중학교 때까지 태권도를 했고, 72kg급 배미경과 55kg급 김주연(이상 25) 등은 원래 유도선수였다. 67kg급 김지은(21)은 배구선수 출신.

이들은 “레슬링이라는 운동 자체가 더 힘들지는 않았다”고 했다. 레슬링 입문의 첫 번째 난관은 복장. 온 몸을 꽉 조이는 타이즈를 입으면 몸매가 가감 없이 드러난다. 때로는 속옷이 살짝 비치기까지. “훈련복 입고 나오라”는 말에 처음에는 모두들 쭈뼛쭈뼛 이었다. 훈련이 끝나면 잽싸게 옷을 갈아입었다.

하지만 땀방울이 굵어질수록 부끄러움은 사라져갔다. 59kg급 엄지은(22)은 “그 과정이야말로 레슬러로 재탄생하는 시간”이라고 회상했다. 이제는 경기 복이 날개다. 원더우먼의 변신에 복장변화가 필수이듯, 이들도 타이즈를 입어야만 힘이 난다.

○“여자라서…”라는 말을 향해 태클

경기복이 익숙해진 다음에도 “여자가 무슨 레슬링이냐”는 핀잔에는 적응할 수 없었다. 특히, 남자 선수들로부터 그런 말을 들을 때면 더 서럽다. “여자들은 체력이 약하니까 뒤에서 뛰어. 여자는 회복능력이 떨어지니까 좀 쉬어.” 이런 말을 듣는 순간, 그녀들의 눈에는 불꽃이 타오른다. 48kg급 장호순(21)조차 데드리프트 105kg을 소화할 정도로 강철체력. 남산공원의 119개짜리 계단도 50초 만에 후다닥 올라간다. 남자들과 훈련할 때도 ‘오기’로 버틴 결과다.

“여성에게는 이중적인 잣대가 있어요. 어떤 때는 여자라서 안 된다고 하고, 어떤 때는 여자라서 이렇게 해야만 한다고 하죠. 상대선수와 싸우기 이전에 고정관념과 싸우는 법을 배웁니다.” 중학교시절, 김지은에게 이기죽거리던 ‘남자1진’은 인사이드태클에 ‘쌍코피’가 터졌다. 그 다음부터는 “여자라서…”라는 말을 입 밖에도 내지 못했다.

○가족과 감독님이 있기에….

삐딱한 시선들 속에서도 지도자와 가족만은 그녀들의 편이 돼 주었다. 장호순은 “난 솔직히 모범생은 아니었다”고 했다. 리라컴퓨터고등학교 시절, 그녀를 레슬링으로 이끈 사람은 이종호 감독. 고된 운동이 싫어 레슬링을 그만두겠다고 하자, 이 감독은 조용히 장호순을 불렀다. “좋아. 대신, 로또 맞으면 그렇게 해라. 당장 네가 운동을 그만두면 나쁜 길로 빠질 게 뻔히 보여. 너 대학가고 싶다고 했지? 운동만 열심히 하면 대학도 갈 수 있도록 꼭 도와줄게.”

자신의 인생을 걱정해주는 선생님은 처음이었다. 장호순은 눈물을 흘리며 이 감독의 품에 안겼다. 장호순은 지난 해 전국체전 은메달리스트가 됐고, 현재 전주 우석대에 재학 중이다.

배미경의 아버지는 씨름선수출신. 처음에는 딸이 운동을 하는 것을 반대했지만, 이제는 자세가 조금만 높아도 “미경아, 엉덩이 비 맞겠다”는 호통소리가 터져 나온다. 어머니는 잠든 딸의 다리에 약을 발라주기도 한다. “어머니가 멍든 다리를 어루만지면서 눈물을 흘리셔서 당황했어요. 사실, 잠에서 깨어났었거든요. 어머니가 민망하실까봐 자는 척 하면서 저도 속으로 울었죠.”

엄지은의 오빠는 지난 해 전국체전 남자 일반부 그레코로만형 66kg급에서 우승을 차지한 엄혁(24·상무). 한태양 역시 얼마 전까지 자매 선수였다. 지고 오면 가족이 더 성화다. 한태양은 “이제 부모님도 준전문가 수준”이라며 웃었다.

○2012년 런던올림픽을 향해!

든든한 지지자가 있어 외로운 싸움도 외롭지 않다. 그녀들의 1차 목표는 9월, 덴마크에서 열리는 세계선수권 출전. 우선, 2,3월에 열릴 1,2,3차 대표선발전을 통과해야만 한다. 이종호 감독은 “지난 해 전국체전 우승자 한태양과 엄지은을 비롯해 6명 전원을 덴마크에 보내겠다”고 했다.

그녀들의 최종목표는 2012년 런던올림픽 출전이다. “선수라면 누구나 꿈꾸는 대회가 올림픽이잖아요. 요시다 가오리 같은 선수가 되고 싶어요.” 막내 장호순의 눈망울이 빛난다. 맏언니 김주연은 “그 큰 꿈 덕분에 호흡이 턱 밑까지 차오르는 절정의 순간도 즐길 수 있다”고 했다.

“이제 오후 훈련해야지.” 이 감독의 호통에 다시 매트로 향하는 선수들. 부끄러움을 태클로 걸어 넘기고, 편견을 옆 굴리기로 헤친 그녀들이 세계를 들어 메칠 날도 머지않아 보였다.

전영희 기자 setupman@donga.com

사진 | 양회성 기자 yoha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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