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lump&Sports]“거, 이상하네” 늪에 빠지다

  • 입력 2005년 6월 22일 03시 0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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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보든 베테랑이든, 아마추어든 프로든 가리지 않는다. 경험자는 “미칠 지경”이라고 호소한다. “다 때려치우고 싶은 심정”이라고 한다. 하지만 벗어나려고 발버둥칠수록 일은 꼬이기만 한다. 슬럼프(slump). 스포츠를 생업으로 삼고 있는 선수들은 이를 고통 중의 고통이라고 말한다. 미국 여자프로골프(LPGA) 데뷔 이래 최악의 슬럼프를 겪고 있는 박세리(28·CJ)의 모습을 보면 슬럼프가 얼마나 피 말리는 것인지 짐작할 수 있다. 》

▽슬럼프의 악순환=벗어나려고 발버둥칠수록 오히려 상황은 더 악화되는 게 슬럼프의 생리. 연습 부족에 따른 체력 저하, 부상, 잘못된 자세, 새로운 환경 등 원인이 명확하다면 나은 편. 심리적 슬럼프일 경우 백약이 소용없어 보인다.

올 시즌 프로야구에서 심한 슬럼프를 겪고 있는 양준혁(35·삼성). 1993년 데뷔 이래 2002년(타율 0.276) 한 해를 제외하고 줄곧 3할 타율을 기록했지만 올해는 20일 현재 0.241에 머물고 있다.

6월 타율이 0.125로 부진한 팀 동료 심정수(30)는 허리 통증 때문이라지만 양준혁은 별다른 원인을 찾지 못하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이유를 모르겠는데 타석에 서면 밸런스가 무너지는 느낌이 든다”는 것. 자신감이 떨어지고 불안감이 커지면서 스트라이크존을 벗어나는 공에도 방망이가 돌아간다. 마음대로 안 되니까 ‘저 투수가 어떤 공을 던질까’, ‘다리 사이가 너무 벌어진 것은 아닐까’ 등등 공연히 머릿속만 바빠진다. 생각이 몰입을 방해해 경기력은 더욱 떨어진다.

▽슬럼프의 극복=슬럼프 탈출 시도는 때로 눈물겹다. 박세리는 “마음을 비우려고 노력한다”고 했고 양준혁은 “체력 훈련을 더 열심히 하고 있다”고 했다. 1991년 메이저리그에서 39타수 무안타의 부진에 빠졌던 보스턴 타자 팀 내링은 뒷머리를 깎아 ‘히트(hit·쳐라)’라는 문구를 새겼다. 또 다른 메이저리거는 야구 배트에 ‘공을 잘 보라’는 의미로 자신의 눈물을 짜내 바르기도 했다. 불안감을 잠재우기 위해 명상과 요가, 담배 등도 애용됐다.

체육과학연구원에서 스포츠심리 분야를 담당하고 있는 김용승 연구원은 “예전에는 불안 수준을 낮추는 방법이 다양하게 시도됐으나 최근에는 전문가를 통해 슬럼프의 원인을 밝히고 맞춤 처방하는 추세”라고 말했다. 국내와 달리 미국 등 스포츠 선진국에서는 스포츠 관련 심리상담가의 역할이 커지고 있다는 것.

최근에는 최면술사까지 등장해 무의식적인 부분까지 파고들고 있다. 심리상담가는 수백 개의 문항으로 이뤄진 문답 테스트와 상담을 통해 원인을 규명한다.

▽행동 시나리오의 강화=슬럼프의 원인은 개인의 성향과 종목에 따라 너무나 다양하기 때문에 일반화가 어렵다. 하지만 김 연구원에 따르면 슬럼프에 잘 빠지지 않는 선수들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경기에서 맞닥뜨릴 수 있는 모든 상황에 대비한 행동 시나리오가 준비되어 있다는 것. 목적은 경기 중에 잡념이 끼어들 소지를 주지 않기 위한 것.

대표적인 예가 ‘타격 천재’로 불리는 메이저리그의 일본인 타자 스즈키 이치로(32·시애틀). 그는 타석에 설 때마다 준비과정에서부터 방망이를 휘두르기까지 수십 개의 동작을 똑같이 반복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또 하나는 실제 생길 수 있는 상황을 머릿속에서 재현해 보는 이미지 트레이닝. 1988년 서울올림픽 탁구 남자단식 금메달리스트로 1990년대 중반까지 한국 탁구를 이끌었던 유남규(37) 현 남자대표팀 감독은 “평소 틈만 나면 이미지 트레이닝을 했던 것이 슬럼프를 거의 겪지 않았던 데 큰 도움이 됐다”고 말했다.

유 감독은 지난해 아테네올림픽 단식 정상에 오른 뒤 올 세계선수권 단식 64강에서 탈락하는 등 부진에 시달렸던 유승민(23·삼성생명)에게도 이미지트레이닝을 강조했다고 덧붙였다.

김성규 기자 kims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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