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라톤계의 큰별 손 기정 -자랑스런 고향친구 손 기정

  • 입력 2004년 4월 22일 18시 5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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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랑스런 고향친구 손 기정

손 기정과 나는 어린 시절 한 마을에서 자란 고향 친구다. 오랫동안 자주 만나면서 한 때 산행을 함께 하기도 했지만 지금은 서로 활동이 여의치 않으니 보는 것만으로도 반갑다. 60년 전 그의 위업을 다시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뛴다.

우리의 소년시절 신의주 보통학교에 이 일성 선생님이 계셨다. 육상선수 평북대표 선수로 조선 신궁경기에 출전했던 분이다. 그 분이 체력과 인내심이 뛰어났던 손 기정의 소질을 일찍 발견하여 신궁경기 예선에서 손 군에 1위를 양보하면서까지 적극적으로 뒤를 밀어주었다. 이 선생님은 이것에 그치지 않고 손 군을 동경에서 취직토록 알선하고 야학과 마라톤을 연습할 수 있도록 왕복 여비는 물론 성금까지 모아 보낼 정도였다. 손 군은 귀국 후 신의주 동익상회에 취직하여 같은 회사 안동(현 丹東)취급소에서 일했다. 당시 그는 신의주 집에서 압록강 철교를 건너 매일같이 달음질하여 출퇴근했는데 이때 체력에 자신을 얻었던 것 같다.

19세 되던 해 청운의 꿈을 안고 상경한 그는 친지 황 대선씨의 소개로 양정고보 육상코치인 유 해학선생을 알게 되어 양정에 입학, 본격적인 훈련을 받기에 이르렀다. 이때 육상부의 3년생 선배인 김 봉수 선수가 그를 거짓 가정교사로 삼아 그의 학비는 물론 생활비까지 대 주었다. 이러한 도움이 없었다면 세계 최고 마라토너의 탄생이 불가능했을지 모른다. 이것도 타고난 운명이라면 운명이다.

나는 8.15해방 때까지 신의주에 남아 있었기 때문에 한동안 그와의 교분이 끊어졌지만 같은 고향의 체육인으로 지금도 서로 의지하고 존경하며 지내오고 있다. 6.25사변 후로는 함께 스키장이나 산행 중에 만나는 기회가 많아 더욱 정이 들게 됐다. 지금도 늘 강조하는 말이 우리 마라톤이 일본한테는 절대로 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의 뇌리엔 강한 민족의식이 자리 잡고 있는 듯 하다. 때로는 죽기 전에 고향 땅을 찾아가 보고 싶다는 간절한 소망을 펴면서 울분을 토하기도 했다.

2년 전 그와 함께 중국 땅으로 백두산을 오를 때도 그는 왜 우리가 우리 땅으로 가지 못하느냐고 통탄했고 평양을 방문한 재미 산악인 편에 정식으로 고향방문 신청을 냈지만 두 해가 지난 지금까지 아무런 소식이 없으니 내 마음도 답답하기만 하다. 백두산 천지를 바라보며 그가 한 말도 "저 산 너머 우리 땅이 언제나 열릴까" 하는 안타까움이었다. 당시 강풍이 몰아치는 속에 서로 몸을 의지하며 하산하던 기억이 새롭다.

손 군과의 스키 인연도 함경도 삼방 스키장에서 시작됐다. 그는 저축은행 근무 당시부터 이미 스키에 심취하여 슬로프에 자주 모습을 나타내곤 했는데 50년대 말 홍 종인씨(전 조선일보 주필)와 함께 대관령 백산장을 찾은 그는 3~4일 묵으면서 스키인들과 친숙해져 여러가지 유익한 환담을 나누곤 했다. 얼마 전의 일이지만 진부령 알프스 스키장에 스키 박물관을 만들었을 때도 직접 참석하여 격려해 준 것을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

그뿐 아니라 강남에 개설된 산악 박물관에도 자주 들러 산악 원로들과 어울리며 지난 날의 회고담을 들려주기도 했다. 마라톤이나 등산이나 결국 자기와의 싸움이니 베를린 올림픽을 제패한 그의 불굴의 투혼은 산악인들에게 좋은 교훈을 주는 셈이다. 80대에 접어들며 보행에 지장을 받아 다소 불편해 보이지만 그는 전혀 개의치 않고 체육인들의 만남을 위해 어느 자리든 부지런히 슛아 다닌다. 백두산 등반에 이어 히로시마를 찾아가 선수들을 격려하고 또 최근에는 베를린으로 프랑크푸르트로, 다시 파리로 사양치 않고 돌아다닌다. 그만큼 정신적으로 건강한 것이다.

'손 기정' 이라는 이름 석자는 우리 민족의 상징이요, 체육인들의 영원한 우상으로 남아있거니와 오늘을 살아가는 현역 체육인들에게 정신적인 귀감으로 용기를 북돋워주고 있다고 생각하니 그가 더욱 존경스럽게 느껴진다.

백 남홍(스키원로)

연국희기자 ykookh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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