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림픽]양정모와 김재엽의 외로운 싸움

  • 입력 2000년 9월 25일 14시 53분


“국민 여러분 기뻐하십시오. 한국의 양정모 선수가 마침내 금메달을 땄습니다.” 정규 방송을 중단한 채 흘러나온 아나운서의 목소리는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국민들은 하던 일을 멈추고 TV와 라디오 앞으로 몰려들었고 반복해서 들리는 아나운서의 멘트에 전국이 들썩거렸다. 한국 올림픽 역사에서 최고의 하이라이트로 꼽히는 몬트리올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양정모(47). 23세의 청년에서 어느덧 불혹의 중년이 된 그는 선수와 지도자로 25년간 몸담았던 조폐공사 레슬링팀이 98년 해체되면서 레슬링계를 떠났다.

그런 그가 한때 투사로 돌변한 적이 있다. 일명 대진표 조작 사건에 대한 정부의 올바른 조사를 촉구하며 피켓을 들고 거리로 나선 것. 97년 전국학생레슬링선수권대회 당시 부산협회 부회장의 아들을 4강에 진출시키기 위해 대진표를 조작, 온갖 부정을 저질렀다는 내용이 알려지면서 레슬링 관계자들이 머리에 띠를 두르고 시위를 벌이는 현장에 양정모가 나타난 것이다.

양정모는 당시 상황을 묻는 기자의 질문에 “더 이상 할 말이 없다”고 답했다. “만신창이가 된 레슬링계를 일으켜 세워야 한다”며 핏대를 올리던 모습은 온데 간데 없었다. 현재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묵묵부답. 다만 “한평생 레슬링만 해온 사람이 레슬링을 떠나 살 수 있겠냐”는 여운만 남겼다. 한때 한국 레슬링의 병폐를 고쳐보겠다고 투지를 불사르던 열정은 세월과 함께 가슴 한켠에 묻어둔 모양이다.

88서울올림픽 유도 60kg급 금메달리스트 김재엽(36)은 은퇴 후 쌍용양회와 마사회에서 코치로 생활하다 현재는 벤처사업가라는 거창한 명함을 새로 달았다. 김재엽이 평생 업으로 삼았던 유도를 버리고 뜬금없이 사업을 시작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그동안 김재엽은 국내 유도계의 대표적인 ‘야당’으로 불려왔다.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거침없이 해대는 직언 때문에 유도협회 관계자들과 항상 불편한 관계에 놓일 수밖에 없었다.

유도계는 용인대 총장인 김정행씨가 유도협회 회장을 겸직하면서부터 용인대 출신과 비용인대 출신의 판정시비가 끊이질 않았다. 비용인대 출신인 김재엽은 시합 때마다 석연치 않은 심판 판정에 강하게 어필해왔고 96애틀랜타올림픽 국가대표 선발전에선 심판판정에 항의하다 일시적으로 연금 지불을 정지당하는 치욕을 겪었다.

98년 8월이었다. 마사회가 김재엽에게 전기영, 윤동식이 96방콕아시안게임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탈락한 것을 문제삼아 사표를 종용하자 김재엽은 눈물을 머금고 짐을 꾸렸다. 엎친 데 덮친 격이라고 할까. 서울올림픽이 낳은 금메달 커플로 동성동본의 어려움 속에서 힘겹게 결혼, 화제를 뿌렸던 아내 김경순(핸드볼)과 합의 이혼하는 불행까지 맛보았다.

그후 김재엽이 부딪힌 세상살이는 끔찍할 정도로 냉정했다. 사업을 하겠다고 큰 소리는 쳤지만 도통 손에 잡히는 아이템이 없었다. 그럴 때마다 자신이 처한 처지가 한심하고 올림픽 금메달리스트라는 꼬리표가 원망스러웠다. 방황의 나날을 보내다 시작한 사업이 이동전화용 무선 데이터 컨텐츠를 제공하는 정보 통신업. 서울 코엑스(한국종합전시장)에 사무실을 내고 (주)TNS란 벤처기업을 설립했는데 얼마 못 가 문을 닫고 말았다. 정확한 자료와 준비 없이 주변 사람들의 말만 믿은 게 화근이었다.

실패의 쓴맛이 채 가시기도 전에 최근 매형의 주선으로 제조업에 뛰어들었다. 아스팔트나 대형 간판 등에 첨가되는 필름을 미국에서 수입해 판매하는 사업이다. 가족끼리 믿고 하는 일이라 사기 당할 염려는 없지만 무역 지식이 없고 영어실력도 부족해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

“운동밖에 모르는 사람이 사업을 한다니 쉽지 않은 게 당연하지요. 컴퓨터도 켤 줄 몰랐으니 오죽했겠습니까. 하지만 전 성공할 겁니다. 반드시 성공해서 다시 유도계로 돌아갈 거예요. 바위에 계란 던지기라도 계속 할 생각입니다.”

이영미/스포츠라이터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