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신라 王城 월지서 고려기와 무더기 발견

  • 동아일보
  • 입력 2024년 3월 2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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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계 “멸망한 나라 왕궁 철저히 파괴 통념 뒤집어”
경주박물관, 유물 3만점 전량 재조사
‘옥간요’ 등 10~11세기 기와 확인돼
고려까지 신라궁궐 일부 잔존 가능성

신라 왕성(王城)이 있던 경주 월지의 출토품에서 고려시대 기와로 추정되는 유물 200여 점이 최근 발견됐다. 고려왕조가 들어선 후에도 통일신라시대의 일부 궁궐이 존속됐을 가능성을 보여주는 근거다.

25일 국립경주박물관은 “1976년 월지에서 출토된 유물 3만3000여 점을 재조사하는 과정에서 고려시대 추정 기와 200여 점을 발견했다”고 밝혔다. 박물관은 2032년까지 수장고에 보관된 월지 출토품 전량을 재조사하는 프로젝트를 지난해부터 진행하고 있다. 고려시대 추정 기와는 ‘옥간요(玉看窰)’가 새겨진 기와 1점과 평평한 면에 원형 돌기 문양을 새긴 일휘문(日輝文) 수막새 8점, 국화무늬 수막새 200점이다. 옥간요와 일휘문 기와는 각각 10세기 후반, 11세기 이후 등장하는 고려 기와로 분류된다.

그런데 가장 많은 양이 나온 국화무늬 수막새는 통일신라 말부터 고려 초까지 사용됐다. 박물관은 이것도 고려시대 때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있다. 경주 천관사지와 천룡사지에서 출토된 국화무늬 수막새에서 기와를 끊어 제작하는 고려시대 기법이 발견돼서다. 이현태 경주박물관 학예연구사는 “천관사지·천룡사지 출토 기와와 월지 출토 기와를 비교해 정확한 제작 시기를 분석할 것”이라고 말했다.

200여 점 모두 고려 기와로 최종 확인되면 고려 왕조가 들어선 뒤에도 통일신라의 일부 궁궐을 유지하기 위해 보수를 했다는 추론이 가능하다. 멸망한 왕성의 궁궐은 철저히 파괴된다는 기존 통념을 뒤엎는 것이다. 이에 대해 학계에선 끝까지 결사 항전한 후백제와는 달리 신라는 정권이양이 상대적으로 순조로웠기에 궁궐 일부를 남겨 놓은 게 아니냐는 해석이 나온다. 이한상 대전대 역사문화학 전공 교수는 “신라 경순왕은 대세가 기울자 왕건에게 나라를 바친 것으로 기록돼 있다”며 “경순왕이 고려 초 경주를 관리하는 사심관으로 임명된 만큼 월지 근처에 그의 별궁이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월지는 조선시대에도 경치가 좋은 ‘안압지’로 알려진 만큼 정자와 같은 건물이 존속했을 수도 있다”고 덧붙였다.

일각에선 고려사에 언급된 조유궁(朝遊宮)이 월지 근처에 있었을 가능성도 제기한다. 고려사에는 ‘1012년 황룡사 탑을 수리하기 위해 경주 조유궁을 헐어 목재를 사용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현태 학예연구사는 “무거운 목재를 옮기려면 황룡사 인근의 월성이나 월지에 조유궁이 있었다고 보는 게 합리적”이라며 “기와로 보수된 건물이 조유궁이 맞는다면 신라가 망하고도 전각이 일시에 파괴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이번 발견이 학계에서 정설로 굳어진다면 월지 출토 유물을 모두 통일신라시대 이전 것으로 본 기존 학설을 재검토해야 한다는 시각도 있다. 예를 들어 월지에서 나온 청동거울(동경) 2점은 중국 요나라 양식에 가깝다. 이 같은 양식의 청동거울이 출토된 요나라 무덤은 통일신라가 멸망한 해(935년)보다 60, 70년이 지난 11세기 초에 지어졌다. 하지만 학계는 청동거울이 월지에서 나왔다는 이유로 이를 통일신라 유물로 간주해왔다. 경주박물관 관계자는 “출토 기와를 재검토해 월지 유물의 연대가 고려시대까지 확장되면 연대 해석을 새롭게 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된다”고 말했다.


사지원 기자 4g1@donga.com
#경주 월지#고려기와#경주박물관#옥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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